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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물러난 자리에서 다시 묻게 되는 시의 본질, 『시로부터의 자유』 (임근수, 시와에세이)

언어를 덜어내며 존재의 미세한 울림을 따라가는 임근수 시인의 새 시집

장세환2026년 3월 25일 오후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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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부터의 자유.jpg출판사 제공

말은 넘치는데 정작 오래 남는 문장은 드문 시대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시를 쓰고, 수많은 언어가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지금, 시는 무엇으로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시로부터의 자유』는 이 질문을 정면에서 끌어안는다. 다만 큰 목소리로 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말이 물러난 자리, 해석과 설명이 멈춘 지점에서 시가 어떻게 다시 시작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임근수 시인의 이번 시집은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시를 쓰며 시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시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시를 과하게 붙잡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의미를 쌓기보다 덜어내고, 설명하기보다 머물며, 언어가 앞서 나가기보다 세계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 걸음 물러서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시편들은 무엇을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사물과 숨결, 움직임과 침묵을 오래 바라보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구성은 순례, 도착, 침묵의 세 갈래로 이어진다. 떠남에서 시작해 멈춤에 이르고, 마침내 말이 멎는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이다. 이 여정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라기보다 내면의 비움을 따라가는 과정처럼 읽힌다. 「집을 떠나며」에서 배낭 안에 담긴 “접히지 않은 생각들”은 길 위에서 조금씩 비워지고, 뒤로 갈수록 시는 더 짧아지고 더 고요해진다.

특히 불교적 사유와 수행의 감각이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룸비니, 마하보디 사원, 금강경, 임제 같은 표지들은 분명하지만, 시는 그것을 교리나 설명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바람, 돌, 물, 몸 같은 감각적인 대상을 통해 비움과 멈춤의 상태를 천천히 환기한다. 수행적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설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시적으로 읽힌다.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축은 AI 시대를 통과하는 시인의 감각이다. 기계가 멈추지 않고 시를 생산하는 시대에, 시인은 속도가 아니라 “머뭇거림의 기술”을 말한다. 이미 준비된 말들 앞에서 놓칠 준비를 한다는 대목은 지금의 문학 환경을 향한 조용하지만 분명한 응답처럼 보인다. 시의 가치가 더 많은 문장을 빠르게 생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남겨 둘 수 없는 것 앞에서 잠시 멈추는 데 있음을 환기한다.

그래서 『시로부터의 자유』는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장치로 독자를 붙들지 않는다. 오히려 한 줄 사라질수록 의미가 더 또렷해지는 역설을 믿는다. “시의 역사는 남긴 말이 아니라 말이 물러난 자리였다”는 문장은 이 시집 전체를 압축하는 핵심에 가깝다. 남겨진 것은 결론이 아니라 여백이고, 목소리가 아니라 그 이후의 숨결이다.

요란한 해석보다 조용한 목격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시집은 오래 남을 법하다. 시를 읽는다는 일이 결국 더 많은 뜻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말하게 둘 수 있을 만큼 자기 안의 소음을 가라앉히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남긴다. 시가 끝난 자리에 비로소 시가 시작되는 순간이 있다면, 이 시집은 그 문턱 가까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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