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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하는 순간에도 삶은 자란다”, 『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 (유수진, 걷는사람)
제주의 풍경과 사라지는 존재들을 감각적으로 붙든 첫 시집
출판사 제공
제10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자인 유수진 시인이 첫 시집 『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를 펴냈다. 걷는사람 시인선 151번째 권으로 출간된 이번 시집은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통해 존재의 상처와 기억, 삶의 속도를 섬세하게 비춘다.
시인은 해류를 떠도는 오리, 언덕을 오르는 당나귀, 녹슨 못과 귤, 화덕과 사과나무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을 시의 중심에 놓는다. 관념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사물의 움직임과 감각을 따라가며 마음의 흔들림을 드러낸다.
“씨앗은 마르는 동안 꽃을 설계한다”, “최고의 속도는 어쩌면 멈칫” 같은 문장은 조급한 시대 속에서도 저마다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의 시간을 붙든다. 시집 곳곳에는 빨리 달려야만 하는 삶에서 잠시 멈춰 서려는 마음이 배어 있다.
제주4·3의 기억도 시 속에 스며 있다. 「경사」, 「자리왓」 같은 작품에서는 폐허가 된 마을과 녹슨 흔적, 사라진 사람들의 자리를 통해 비극의 시간을 현재의 감각으로 불러낸다. 시인은 사건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잊히기도 딱 좋은 경사도” 같은 표현으로 망각의 구조를 조용히 드러낸다.
짧고 응축된 시와 긴 호흡의 산문시가 함께 배치된 점도 특징이다. 「누워서 하는 생각은 멀리도 간다」에서는 시간을 거꾸로 걷는 상상으로 기억과 계절, 하루의 흐름을 넘나든다. 「여름에 부엌」에서는 접시와 빗소리, 넝쿨의 움직임으로 계절의 감각을 살아 있게 만든다.
유수진 시인은 2015년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으로 주목받았다.
『잘 구워 낸 여름들은 유행가가 되고』는 상처를 크게 외치기보다 오래 바라보는 시집이다. 사라지는 풍경과 지나간 계절의 기척을 천천히 붙들며,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의 속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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