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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내려놓는 순간 시작되는 시, 『토끼는 발걸음을 세지 않는다』 (박흥순, 서로)
여섯 개의 행성으로 읽는 시집, 삶을 측정하는 시대에 던지는 질문
출판사 제공
하루 걸음 수와 성과 지표로 하루를 정리하는 시대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해냈는지로 삶의 밀도를 계산하는 일상이 익숙해진 지금, 한 시집이 정반대 방향의 질문을 던진다. 박흥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토끼는 발걸음을 세지 않는다』가 출간됐다.
이 시집은 ‘숫자’로 환산되는 삶의 감각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만보기를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들리는 감각과 기억, 그리고 몸의 언어를 다시 불러내며, 측정되지 않는 삶의 결을 시로 풀어낸다.
구성 또한 눈에 띈다. 총 60편의 시는 여섯 개의 ‘행성’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자유, 생존, 자연, 기억, 문명, 뿌리라는 주제를 따라 이어지는 이 구조는 개별 시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을 형성한다. 독자는 한 편씩 읽기보다 행성을 통과하듯 시집 전체를 경험하게 된다.
각 행성은 현대인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를 포착한다. 노동과 생존의 마찰, 자연의 순환, 기억의 층위, 디지털 문명의 균열, 그리고 역사와 땅의 감각까지. 서로 다른 언어와 시간, 감각이 충돌하며 하나의 궤적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 시집은 AI와 데이터가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의 시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빠르게 생성되는 문장과 달리, 몸으로 통과한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만 만들어지는 언어의 밀도를 강조한다. 숫자로 기록되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삶의 중심에 있음을 환기시키는 대목이다.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시인은 공사 현장과 일상의 시간을 몸으로 통과하며 언어를 다져왔다. 이론보다 사물, 언어보다 경험을 앞세운 그의 시선은 이번 시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은 여섯 개의 행성을 가로지르는 서사 구조로 확장된다.
측정 가능한 것들에 둘러싸인 시대, 이 시집은 다른 방식의 질문을 남긴다. 삶을 셀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살아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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