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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36년, 디지털 시대의 허무를 해부하다 『생의 후면을 겉도는 삽입곡처럼』 출간(박정수, 문학세계사)

금속성 화면의 소음 속에서, 사물의 표정으로 삶의 뒤쪽을 만진다

장세환2025년 12월 29일 오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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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후면을 겉도는 삽입곡처럼.jpg출판사 제공

199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정수 시인이 첫 시집 『생의 후면을 겉도는 삽입곡처럼』을 내놓았다. 등단 후 36년의 공백을 지나, 시인은 2025년 12월 30일 책 한 권으로 다시 독자 앞에 선다. 이번 시집은 아날로그 감성이 저물고 디지털 문명이 일상을 점령한 시대에, 현대인이 상실해가는 존재의 본질을 시로 되짚는다. 시인은 스스로를 “냉철한 사물주의자”라 부르며, 감정을 과하게 앞세우기보다 사물의 면을 붙잡고 삶의 온도를 재단한다.

시집에는 100편의 시가 실렸다. 1부 ‘누구도 첫 발자국 지우지 않는다’는 제목부터가 선명하다. 「디지털뷰 속으로 내리는 눈」, 「카톡 사랑」, 「너튜브」, 「지하철 7호선 파도를 타고」 같은 제목이 낯익다. 눈송이의 방향, 종이컵의 얇은 벽, 콘센트의 검은 구멍 같은 것들이 시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도시의 사소한 물건들이, 사실은 우리의 감정과 노동을 고정해주는 핀처럼 박혀 있다는 걸 보여준다.

박정수의 시는 소비 구조와 가상공간이 만든 소통의 단절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금속성 이빨을 가진 디지털 괴물”이라는 표현은 그 상징이다. 하지만 시가 던지는 질문은 비난이 아니다. 왜 이렇게 빨라졌는지, 왜 이렇게 고립됐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어떤 마음은 끝까지 남는지를 탐색한다. 시는 한 발 물러서서 본다. 그래서 더 아프게 닿는다.

문학세계사 소개글은 이 시집을 ‘오래 어두웠던 빈집’에 비유한다. 전기와 콘센트, 전구까지 달아두고 주인이 떠난 집. 스위치를 누를 손길만 기다리던 집이다. 시인은 그 기다림을 자신의 시간으로 바꿔 썼다. 오래 미뤄둔 말들이 한꺼번에 폭발하지 않게, 문장마다 숨을 쪼개 넣었다.

표제작 「생의 후면을 겉도는 삽입곡처럼」은 삶의 뒤편을 따라가는 ‘삽입곡’의 이미지를 빌려, 대리 인생의 덜컹거림을 드러낸다. 낡은 LP 바늘이 트랙을 이탈하듯, 누구나 한 번쯤 제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고백이 묻어난다. 이 책의 정서는 크게 울지 않는다. 대신 억눌린 숨을 길게 내쉰다. 독자는 그 호흡을 따라가며, 자신의 후면도 같이 돌아본다.

첫 시집이 이렇게 늦게 온 이유도 시 안에 숨어 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했고, 언어도 그 속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시인은 오래 묵힌 질문을 꺼냈다. 지금 우리가 주고받는 말이 진짜 소통인지, 서로의 표정을 얼마나 읽는지, 고장 난 감정의 스위치는 어디에 달렸는지. 책은 그 스위치를 찾는 과정으로 읽힌다. 차갑게 읽히는 문장 끝에서, 오히려 작은 온기가 남는다. 그 온기는 오래간다.

하루가 끝날 무렵, 잘 살아냈다는 말이 허전하게 느껴질 때 이 시집을 펼치면 좋다. 시를 멀리했던 독자에게도 이 책은 좋은 입구가 된다. 끝내 말로 다 못한 마음을, 사물의 그림자 쪽에서 조용히 건져 올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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