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시는 어디까지 세계를 품을 수 있는가. 황명현의 새 시집 『시의 비의』(책과나무)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미셸 푸코와 하이젠베르크, 막스 플랑크와 니체, 공자와 노자, 붓다와 용수, 겸재와 안견 등 시대와 분야를 가로지르는 인물과 사상이 한 권의 시집 안에서 서로 만나며, 시가 철학과 역사, 예술과 과학, 종교와 정치의 경계를 어떻게 넘나들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책은 여섯 부로 나뉘어 있다. 「스티븐과 제인」에서는 과학과 신앙, 사랑과 고독이 교차하는 인간적 이야기를 담고, 「동양사상」에서는 공자와 노자, 대승경전과 용수의 공(空)을 오늘의 질문으로 다시 불러낸다. 「전람회의 그림」에서는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통해 그림 뒤에 겹쳐진 식민지의 폭력과 인간의 비극을 함께 바라본다. 「수족관」과 「금강초롱」에서는 니체와 다윈, 버지니아 울프, 한국 현대사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삶과 죽음, 자유와 신념의 문제를 되묻는다. 마지막 「주석하는 시」 연작에서는 역사적 기록과 개인적 기억을 시 속에 함께 놓으며 서정과 기록, 시와 산문의 경계를 확장한다.
시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죽음과 자유에 대한 응시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캐테 콜비츠, 나치 치하에서 가족을 잃은 막스 플랑크,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람들, 역사의 폭력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을 단순한 비극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의 신념과 사랑, 욕망과 책임을 묻고,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시 자신도 심판대에 올려놓는다. “시의 비의는 이 상황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시가 현실과 맞부딪치며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해야 한다는 태도를 압축한다.
『시의 비의』는 쉽게 읽히는 시집은 아니다. 철학과 물리학, 불교와 유학, 미술과 음악, 한국 현대사와 개인의 기억이 겹겹이 포개지며 독자에게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밀도야말로 이 시집이 선택한 방식이다. 시인은 세계를 단순하게 압축하거나 아름다운 언어로 정돈하기보다 서로 충돌하는 생각과 현실을 최대한 시 안에 남겨 두려 한다.
결국 이 시집에서 ‘비의’란 감춰진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를 바라보고 의심하며 다시 묻는 과정이다. 황명현은 시를 통해 “현실 앞에서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시의 비의』는 시가 단순한 서정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를 읽고 다시 배열하는 사유의 방식임을 보여주는 밀도 높은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