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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름으로 지나온 시간을 껴안다”, 『이미 그 자리』 출간(오진채, 생각나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비로소 마주한 삶의 자리… 담담한 기억과 위로의 에세이

장세환2026년 5월 15일 오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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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자라.jpg출판사 제공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함께 살아갈 때는 미처 몰랐던 말과 표정, 오래된 집 안의 공기와 밥 냄새 같은 것들이다. 오진채 작가의 에세이 『이미 그 자리』는 부모를 잃은 뒤 찾아온 공허와 기억을 따라가며, 결국 삶은 이미 지나온 자리마다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들려주는 책이다.

책은 평생 곁을 지켜온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시작된다. 저자는 부모와 함께 살았던 예산의 집에 홀로 머물며 어린 시절과 가족의 시간을 하나씩 꺼내 본다. 3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흔적까지 겹쳐지며, 기억 속 풍경들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미 그 자리』는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인 고백으로 독자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신 방학날 입속의 껌, 골목길, 삼각지의 짜장면집, 하얀 집의 거실 같은 아주 평범한 장면들을 천천히 불러낸다.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모여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담담한 문장으로 전한다.

특히 책에는 부모 세대가 지나온 시대의 공기 또한 깊게 배어 있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어머니의 삶, 서울 삼각지에서 스무 명의 밥상을 책임지던 시간, 폐결핵과 가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견뎌야 했던 세월이 구체적인 생활의 풍경 속에 녹아 있다. 저자는 부모를 영웅처럼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흔들리고 지치면서도 묵묵히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제목 ‘이미 그 자리’ 역시 그런 깨달음에서 나온다. 실패와 후회, 외로움 속에서도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자리마다 조금씩 쌓여 있었다는 의미다. 저자는 미래를 향해 조급하게 달려가기보다, 지금까지 견디며 살아온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라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문장들은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다. “지금 이대로도 모두 지나가는 과정”이라는 책의 시선은 빠른 속도와 결과만을 요구하는 시대 속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에게는 기억의 기록으로, 삶의 방향을 잃은 이들에게는 잠시 멈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위로의 에세이로 읽힌다.

오진채 작가는 경북 의성 출생으로 문학고을 수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 그 자리』는 작가가 오랜 시간 품어온 가족의 기억과 삶의 감정을 정직하게 풀어낸 첫 기록이다.

삶은 언제나 앞으로만 흐르는 듯 보이지만, 때로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비로소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미 그 자리』는 그 조용한 되돌아봄의 시간을 독자 곁에 가만히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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