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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끝내 외우지 못한 여름의 빛,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 출간(정보영, 걷는사람)
청춘의 상처와 사랑을 다시 불러오는 첫 시집
출판사 제공
청춘의 여름을 통째로 건너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 법한 장면들이 있다. 에어컨도 잘 듣지 않는 방 안에서 뒤척이던 밤, 골목 끝 버려진 화분과 눅진한 공기의 감각, 말캉한 자두를 한입 베어 물던 순간처럼 사소하지만 오래 남는 장면들이다. 정보영 시인의 첫 시집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는 그런 기억의 결을 섬세하게 건져 올린 책이다. 걷는사람 시인선 138번째 작품으로 2025년 가을 출간됐으며, 184쪽 분량에 담긴 46편의 시가 우리 각자의 청춘을 다시 불러낸다.
정보영은 에세이 『서른이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 앤솔러지 『지구 밖의 사랑』으로 먼저 독자를 만난 뒤, 이번 시집에서 자신의 시 세계를 온전히 펼쳐 보인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시 창작 동인 ‘행성’에서 활동해 온 그는 “청춘의 환희와 불안, 사랑과 상실의 감각을 통과해 온 이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시인은 “넘칠 듯 빛나”는 여름의 눈부심을 노래하면서도 그 빛의 이면에 드리운 그늘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다. “눈 감으면 선명한 여름”이 떠오르는 건, 기쁨만이 아니라 후회와 미완의 감정이 함께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시는 조용히 상기시킨다.
시집은 전체 4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그립”, “썸머타임”, “상영관” 같은 작품을 통해 여름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쌓아 올린다. “어둑어둑한 낮”과 “버려진 화분뿐인 골목”, “한입 베어 물기에 딱 알맞”은 “말캉한 자두”는 어느 해인지 알 수 없는 한 시절을 묵묵히 불러낸다. “천장에 달린 프로젝터를 바라보자 /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는 구절 뒤에 “엎질러진 물처럼 / 여름이 쏟아져 있었다”는 마무리는, 이미 흘러가버린 계절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게 한다.
2부와 3부에서는 사랑과 우정, 병과 불안,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한 겹 더 깊어진 목소리로 등장한다. “평양냉면 먹기”에서 서로의 그릇에 오이와 면을 덜어 주는 연인의 몸짓, “작고 넓은 방”에 머무는 젊은 날의 고독, “왼쪽 눈에 점안하세요” 같은 제목들이 보여주듯 시인의 언어는 크지 않은 장면들을 통해 관계의 온도를 드러낸다. “불 끄고 누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 여름밤에는 자꾸 뒤척이게 되고”로 시작하는 “썸머타임”처럼, 시집 곳곳에는 냉장고 소리, 뒤척이는 이불, 눅진한 공기가 함께 뒤엉켜 하나의 감정 풍경을 만든다.
4부에서는 “행방”, “세상의 모든 안녕”, “자작나무 껍질에서 유서가 자라난다” 같은 시들을 통해 이별과 애도의 정서를 조용히 응시한다. “밤마다 몰래 눈물을 흘린” 시간들, “어디로 조문을 가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지만, 시인의 시선은 끝내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형광등 스위치를 켜 봅니다 / 깜빡한 게 있다는 듯 / 가득한 빛”이라는 구절 뒤에 “빛을 쥐었다 폅니다 / 아무도 사라지지 못하게”라는 다짐을 놓음으로써, 이미 지나간 여름과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지금 여기의 삶을 버티게 하는 힘임을 말한다.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라는 제목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정답처럼 외워두고 쓰는 사랑이 아니라, 한 번뿐인 순간마다 서툴게 부딪히고 실패하며 배워가는 사랑, 그 과정에서 생겨난 상처와 안부의 기억을 시인은 그대로 드러낸다. “누구나 다 그렇다고 / 그래 /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 / 그래”라는 짧은 대화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속으로 되뇌어 온 말인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천천히 넘기다 보면, 각자의 삶에서 지나쳐 버린 여름 한 페이지와 사랑의 표정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을 만나게 된다.
조용하지만 또렷한 언어로 젊음의 상흔과 희망, 고독과 사랑을 세공한 『외워서 하는 사랑 말고』는, 오직 기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 시절을 통과해 온 독자에게 오래 남는 첫 시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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