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발해는 잊힌 나라가 아니라, 지워진 나라다.” 이동순 시인의 신작 시집 『나는 발해로 간다』는 이 선언에서 출발한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반세기 넘게 백석, 홍범도, 고려인 강제이주 등 역사 속에서 지워진 존재들을 복원해온 그는 이번에는 발해를 향한다. 수백 년을 존속했으나 스스로 남긴 기록이 거의 없어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왕조, 발해를 시인의 발품과 상상력으로 다시 불러낸 것이다.
총 66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은 1부 「빛의 개국」에서 발해의 건국과 흥성을, 2부 「산과 바다의 나라」에서 삶과 풍속을, 3부 「침묵의 지도」에서 멸망과 기록되지 않은 현실을, 4부 「잊힌 제국」에서 유민과 오늘의 역사적 맥락을, 5부 「다시 빛나는 별들」에서 후대의 기억과 계승을 다룬다. 대조영과 천문령 전투, 정효공주와 이름 없는 여인들, 농부와 악사, 승려와 유민까지—왕조의 중심뿐 아니라 주변부의 목소리들이 시 속에 살아난다.
시집 곳곳에는 호명의 리듬이 흐른다. “치미야 치미야”, “정효야 정효야”, “말하라, 발해”와 같은 구절은 사라진 존재를 직접 불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기록이 부족한 발해의 역사를 문헌적 설명으로 채우는 대신, 그 시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했을 법한 살아 있는 말의 숨결을 되살리려는 시적 선택이다. 시인은 「기록되지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너의 언어는 사라졌으나 너의 침묵이 내 시가 되리니”
폐허와 유적은 단순한 쇠락의 흔적이 아니다. 부서진 기와와 무너진 성곽, 도굴된 무덤과 이름 없는 뼛조각은 사라진 시간을 증언하는 장소다. 시인은 그 앞에서 오래 귀를 기울이며, 절망이 아닌 꺼지지 않은 불빛을 찾는다. 발해라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과 삶의 숨결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발해로 간다』는 단순히 과거의 왕조를 복원하려는 작업이 아니다. 시인은 발해를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함께 공존과 협력으로 일군 나라로 바라본다. 그것은 오늘날 분열과 갈등이 깊어진 사회가 되돌아봐야 할 공동체적 가치다. 발해는 천 년 전 사라진 왕국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역사적 거울이다.
시집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묻는다. “우리는 왜 이토록 작아졌는가. 왜 북방의 기억을 잃어버렸는가.”
『나는 발해로 간다』는 그 질문을 독자에게 건네며, 잊힌 이름을 잊힌 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한 시인의 문학적 선언으로 남는다. 천 년의 침묵을 건너 도착한 이 시집은, 발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간절한 호명(呼名)의 노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