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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갈된 마음의 바닥에서 다시 불어오는 바람,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 출간(유희주, 푸른사상)
몸과 기억, 관계와 상실을 통과한 시의 기록
출판사 제공
유희주 시인의 새 시집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 ― 사라지는 연습에 대하여』가 푸른사상 시선 226번으로 출간됐다. 이번 시집은 고갈된 감정과 기억의 자리에서 다시 삶의 움직임을 길어 올리는 시편들로 채워졌다. 몸의 체험에서 출발한 시선은 가족과 사회, 관계와 문명을 지나 다시 내면으로 되돌아오며 삶의 흔적을 천천히 더듬는다.
시집 제목인 ‘화을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한다. 시인은 이를 “끝과 소멸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움직임”이라고 설명한다. 마른 우물은 고갈된 기억과 감정, 비어버린 내면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텅 빈 곳에서도 무언가를 다시 흔들고 움직이게 하는 힘, 그것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바람의 이미지다.
표제작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은 상실 이후의 시간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눈물 구덩이에 먼지가 날립니다”라는 첫 문장부터 시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늑골에 걸린 찢어진 비닐봉지 같은 기억, 현재의 소멸을 견디는 몸의 감각, 굳은살처럼 단단해진 삶의 표면들이 직설적인 언어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인은 끝내 생의 방향을 놓지 않는다. “별을 향해 전화를 걸면 긴 치마를 입고 있던 내가 걸어 나올 수 있겠습니까”라는 문장은 사라진 존재와 기억을 다시 불러내려는 간절한 몸짓처럼 읽힌다.
이번 시집에는 가족과 어머니를 둘러싼 기억도 깊게 스며 있다. 「어머니 수발」, 「굽은 허리, 복사꽃」, 「사라진 집의 힘」 같은 시편들은 돌봄과 상실, 늙음과 시간의 흔적을 조용히 응시한다. 화려한 수사보다 생활의 표면에 남은 감각을 붙드는 방식이 특징이다. 몸이 기억하는 노동과 피로, 관계의 온기가 시 속에서 오래 머문다.
시인은 몸의 경험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시인 노트에서 그는 “한쪽으로 밀려난 삶이 오히려 문학을 향한 정신적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말한다. 서정적인 언어를 꾸미기보다 몸이 겪은 이야기를 직접적인 언어로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언어는 화려하게 장식되기보다 마르고 단단한 질감을 품고 있다.
「완성으로 가는 그림」에서는 기억과 결핍이 어떻게 다시 삶의 힘으로 이어지는지가 드러난다. 여러 겹의 물감을 덧칠하듯 살아온 시간 위에 또 다른 색을 얹으며, 상처 입은 기억마저 새로운 풍경의 일부로 바꾸려 한다. “손에 들린 붉은 금붕어를 잘 키우겠다는 다짐” 같은 문장은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조용한 의지를 보여준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유희주 시인은 『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와 소설, 산문을 넘나들며 꾸준히 창작을 이어왔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문학과 미술을 독학으로 익혔고, 예순의 나이에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에서 비주얼 아트를 공부하며 예술 세계를 확장했다. 문학과 그림을 함께 이어온 삶의 시간이 이번 시집 곳곳에도 배어 있다.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은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시집이면서 동시에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각들에 대한 기록이다. 관계가 떠난 자리와 기억이 마른 자리에서도 삶은 다시 움직이고, 언어는 다시 바람처럼 불어온다. 시인은 그 흔들림을 끝까지 바라보며 말한다. 비어 있는 곳에서도 여전히 살아갈 힘은 남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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