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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융단 위를 걸으며, 『푸른 융단 위를 걸으며』 (김광련, 시와에세이)

일상의 기억과 고향의 풍경을 곱씹는 서정의 산책 — 찐쌀처럼 여운을 남기는 시편들

장세환2026년 5월 4일 오후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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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융단 위를 걸으며.jpg출판사 제공

김광련 시인의 신작 『푸른 융단 위를 걸으며』는 소소한 일상과 오래된 기억을 정성스럽게 꺼내어 놓는 시집이다. 시인은 “내게 온 모든 시간이 고맙고 감사”하다는 고백을 바탕으로, 사소한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삶의 결을 읽어낸다. 이번 시집은 네 개의 부로 나뉘어 일상·기억·관계·귀환의 서사를 차분히 펼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만의 오래된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시집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온도다. 김광련의 시어는 과장이나 수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장면을 선명하게 포착한다. 예컨대 「수선화」의 한 장면은 담장 아래에서 피어난 꽃을 통해 소박한 기쁨을 전하고, 「은사시나무」는 노년의 몸과 마음을 섬세하게 비춘다. 시인은 일상의 재료들을 정성껏 다듬어 ‘찐쌀처럼 여운을 남기는’ 시적 맛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표현은 시인의 말과 해설에서도 반복되는 핵심적 미학으로,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구성 면에서 이 시집은 균형감이 돋보인다. 제1부는 고향과 가족, 계절의 감각을 중심으로 한 서정적 장면들을 모았고, 제2부는 꿈과 불면, 내면의 시간에 대한 성찰을 담는다. 제3부에서는 일상적 사물과 관계의 디테일—진공청소기, 찰밥, 강아지 같은—을 통해 삶의 질감을 드러내며, 제4부는 귀환과 숙성, 밤 산책 같은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이 흐름은 독자가 시집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지금-여기’와 ‘과거-기억’ 사이를 오가게 만든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의 관찰력이다. 작은 풍경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태도는 시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된다. 예를 들어 「둥지를 떠나는 새」에서는 어미의 시선과 딸의 출발을 동시에 포착하며, 삶의 전환을 따뜻하게 응시한다. 「흰 파도를 보다」에서는 바다와 시간의 무게를 담담하게 마주하는 순간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이런 장면들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 속 풍경을 다시 꺼내보게 한다.

문체는 담담하지만 리듬감이 있다. 짧은 행과 여백을 활용해 호흡을 조절하고, 때로는 일상어의 소박함이 강한 울림을 만든다. 평론가 송기한의 해설이 지적하듯, 김광련의 시는 ‘연과 연 사이를 오르내리는’ 여운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향수나 회고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시적 기능으로 작동한다.

비평적으로 보면, 이 시집은 극적인 실험성보다는 공감 가능한 서정에 무게를 둔다. 따라서 파격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온화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일상과 기억의 미세한 결을 음미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오히려 더 큰 만족을 줄 것이다. 시집은 사건보다 감각을, 설명보다 체험을 택한다. 그 선택은 오늘날 빠르게 소비되는 문화 속에서 느리게 읽히는 가치로 귀결된다.

결국 『푸른 융단 위를 걸으며』는 고향의 골목, 어머니의 등, 밤바다의 파도 같은 친숙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내면을 조용히 흔든다. 시인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시간이 지금의 우리 안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묻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오래된 풍경을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시집은 따뜻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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