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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살리는 시의 윤리, 『거기 항가새꽃』(문설희, 고요아침)

살림의 언어로 삶과 기억의 결을 길어 올리는 생활 서사 시집

장세환2026년 4월 28일 오후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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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항가새꽃.jpg출판사 제공

『거기 항가새꽃』은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언어로 세계를 비추는 시집이다. 문설희의 이 시집은 거대한 서사나 과잉된 비유로 중심을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살림의 현장, 가족의 기억, 자연의 한 장면을 통해 삶을 지탱하는 감각들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 시집에서 시는 특별한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꿀병이 열리지 않는 순간, 미나리를 심던 어린 시절의 기억, 포장재 에어캡의 질감, 겨울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 같은 장면들이 시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장면들은 일상의 기능적 역할을 넘어, 관계와 존재의 윤리를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로 전환된다.

표제작 「거기 항가새꽃」은 이 시집의 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항가새꽃은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산소 곁에서 묵묵히 피어 있는 존재다. 벌과 나비, 산새만이 찾아오는 자리에서 시인은 그 꽃을 ‘살림 세운 웃대 할머니’에 비유한다. 이 비유는 자연과 인간, 기억과 공간을 겹쳐 놓으며 삶을 지탱해 온 여성적 노동의 시간을 불러낸다.

문설희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완충’의 감각이다. 「에어캡」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여백이자 가장자리로 규정한다. 중심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완충재, 무게와 비중은 미미하지만 필수적인 존재. 이 인식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시는 앞에 나서지 않지만, 삶이 붕괴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구조로 기능한다.

「벨트스패너」에서 꿀병 뚜껑이 열리는 순간은 단순한 생활의 해결이자, 막힌 삶이 풀리는 은유로 확장된다. 도구 하나가 세상을 여는 경험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문장으로 이어지며, 시는 해결사라는 개념을 인간 관계의 윤리로 자연스럽게 옮겨 놓는다. 이 과정에는 과장이나 교훈의 톤이 없다. 다만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체감의 언어가 있을 뿐이다.

이 시집은 가족의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절제되어 있다. 「미나리」와 「동백꽃」에서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호출되기보다, 음식과 식물, 몸짓과 사물의 감각으로 현현한다. 특히 동백꽃이 몸속의 꿀을 다 내어준 뒤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말없이 감내해 온 모성의 시간을 은유적으로 호출하며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문설희의 시어는 유하고 보드랍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연약함이 아니라, 오래 견뎌 온 힘에 가깝다. 이 시집의 언어는 날카롭게 세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존재들을 가만히 호명함으로써, 세계가 유지되어 온 방식을 되묻는다.

『거기 항가새꽃』은 한국 생활시의 한 계보 위에 서 있다. 이 시집은 노동의 현장, 가족의 기억,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생활의 언어로 풀어내며, 시가 사유와 감정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말이 많지 않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 시편들이다.

이 시집에서 ‘거기’라는 말은 장소를 가리키는 동시에 태도를 의미한다. 중심에서 벗어난 자리, 그러나 삶이 실제로 진행되는 자리. 문설희의 시는 그곳에 머문다. 그리고 그 머묾 자체가 세계를 지탱하는 방식임을 조용히 증명한다.

『거기 항가새꽃』은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중심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시집이다. 가장자리에 머물러 여백을 살리는 이 시의 태도는, 오늘의 삶에서 시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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