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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아픔의 이름을 부르다 『무증상 환자』 신간 (문혜진 | 난다)
침묵과 통증, 멀쩡해 보이는 세계의 균열을 기록한 9년 만의 시집
출판사 제공
문혜진의 네 번째 시집 『무증상 환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통증을 끝까지 응시하는 책이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 “멀쩡해 보여도 아픈 사람, 아파 보여도 멀쩡한 사람”이 뒤섞인 시대를 문혜진은 병리의 언어가 아닌 시의 언어로 기록한다. 이 시집에서 고통은 증상이 아니라, 숨겨진 구조이며, 침묵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가깝다.
시집의 첫 시 「책 속을 걷는 여자」는 독자를 곧바로 불안정한 세계로 이끈다.
너는 잘못 걸었다
팅
팅
내리꽂는 글자의 파문
여기서 ‘잘못 걷는’ 행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언어의 세계, 활자의 세계, 이미 봉인된 시간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 자체가 위험하다는 인식이다. ‘팅’ 하고 튀어 오르는 소리는 문명이 내는 경고음처럼 들린다. 문혜진은 시를 읽는 행위조차 안전지대가 아님을 처음부터 분명히 한다.
표제작 「무증상 환자」는 이 시집의 진단서처럼 기능한다. 시 속 세계에서는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약을 사고, 카페에 가고, 배송 알림이 울린다. 그러나 통증은 말해지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 ‘무증상’이란 아프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을 말할 언어가 거세된 상태를 의미한다.
문혜진의 시적 화자는 자주 이동한다. 북악스카이웨이, 광화문 빌딩 숲, 사막과 극지, 박물관과 열차. 「북악스카이웨이」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북극의 레밍처럼 절벽을 향해 차를 모는 사람들
뜨지 않은 별들의 파열음
안개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희미해져간다
레밍의 이미지는 집단적 추락을 암시하지만, 화자는 그 안에서 ‘희미해짐’을 선택한다. 사라짐에 가까운 이 전략은 저항의 한 형태다. 끝까지 선명해지기를 거부함으로써, 세계의 속도와 충돌하지 않으려는 몸의 선택이다.
이 시집에서 중요한 감각은 ‘기다림’이다. 시인은 실제 부상 이후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며, 타인의 고통을 뒤늦게 몸으로 받아들였다고 고백한다. 그 기다림의 감각은 시 속 자연 이미지로 번역된다. 「누가 지나간다」에서 공간은 계속 흔들린다.
이미 지나간 발이
아직 서성인다
지나간 것과 남아 있는 것의 경계가 무너진 이 문장은, 트라우마의 시간을 정확히 가리킨다. 트라우마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재를 침범하는 움직임이다. 문혜진의 시는 그 ‘아직’을 끝까지 붙잡는다.
시집의 후반부, 「얼굴 작두 ― 유대인 박물관에서」는 기억과 폭력의 문제를 직시한다.
발을 뗄 때마다
챙, 챙
여기서 발걸음은 곧 가해의 반복이다. 기억을 밟고 지나가는 몸의 무게, 그때마다 울리는 금속음은 ‘기억의 공백’이 어떻게 현재화되는지를 보여준다. 문혜진은 역사를 추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몸의 감각으로 다시 재현한다.
『무증상 환자』에서 자연은 위안의 장소인 동시에,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장치다. 아마릴리스, 산목련, 능소화, 순록이끼, 새소리와 울음은 모두 통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신호들이다. 시인은 “저항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색감이 더욱 풍부해진다”고 말한다. 이 시집의 색은 바로 그 응시의 결과다.
마지막에 실린 「문혜진의 편지」와 영문 번역 시 「Asymptomatic Patient」는 이 시집이 한 언어권에 갇히지 않으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증상이 없다고 말해지는 세계에서, 이 시들은 번역을 통해서라도 계속 말 걸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증상 환자』는 조용하지만 집요한 시집이다. 이 시들은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곳에서 끝내 침묵을 통과해 나온다. 보이지 않는 아픔을 이름 붙이는 일, 그 일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시집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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