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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의 끝에서 마주한 삶의 심연, 『눈이 멀도록 환하겠다』(이인자, 이um)
지렁이의 몸으로 버텨낸 시대의 기억, 여성의 생과 노동을 통과한 시선의 기록
출판사 제공
한 시대를 통과한 목소리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눈이 멀도록 환하겠다』는 화려한 수사나 관념적 사유보다, 몸으로 견뎌낸 삶의 기억을 통해 시를 구축하는 시집이다. 1940년생 시인 이인자는 전쟁과 가난, 노동의 시간을 통과하며 축적된 감각을 가장 미세한 생명, 가장 낮은 존재의 형상으로 옮겨 놓는다. 이 시집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지렁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시대를 버텨낸 존재 방식 그 자체다.
이미지 속 해설이 말하듯, 이 시집의 핵심은 ‘회상’이다. 그러나 그 회상은 과거를 미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근원을 향해 다시금 사유하는 존재론적 행위”로 기능한다. 개인의 기억은 곧 시대의 기억이며, 한 사람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라는 인식 위에서 시는 출발한다. 해방과 전쟁, 산업화의 시간을 살아낸 세대의 경험은 이 시집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적 언어를 구성하는 근원으로 작동한다.
시집 속 언어는 꾸미지 않는다. 오히려 거칠고 건조한 일상의 결을 그대로 드러낸다. “오랜 세월 앓고 있어 / 눈 퀭하고 앞섶 벌어져 있다”로 시작되는 시편은 삶의 피로를 숨기지 않고 노출시키며, 빈집과 굶주림, 고립의 감각을 통해 존재의 균열을 드러낸다. 또 다른 시에서는 “날된장에 밥을 먹는다”는 문장 하나로 노동과 가난, 그리고 그 속에서 이어져 온 생의 시간을 응축한다. 이때 음식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소이자 삶을 버텨낸 증거가 된다.
이 시집이 도달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상흔을 위로하거나 덮지 않는다는 태도다. 오히려 “밟혀도 제대로 꿈틀거리지 못하는 지렁이의 몸”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온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상승과 성공의 서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끝내 땅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존재의 감각을 통해 질문은 되돌아온다. 지금 이 시대에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인자의 시는 과거를 회고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기억을 다시 꺼내어 현재를 해석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이미지에 인용된 평처럼, 이는 “존재의 근원을 향해 다시 사유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시는 결국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견디기 위한 방식으로 다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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