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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적막 속에서 길어 올린 오래된 삶의 결, 『가물치 우는 밤』 (박춘희, 파란)
사라져가는 마을의 풍경과 누대의 상처를 서정으로 길어 올린 박춘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출판사 제공
저녁은 하루가 저무는 시간이면서, 보이지 않던 삶의 결이 서서히 떠오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물치 우는 밤』은 바로 그 어스름의 감각에서 시작한다. 환하게 드러나지 않던 상처와 기억, 오래된 생의 무늬들이 이 시집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박춘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익숙한 서정의 결을 따라가면서도, 개인의 체험을 넘어 우리 삶의 밑바닥에 오래 눌러붙어 있던 감정과 풍경을 불러낸다.
이번 시집에는 「늦은 귀가」, 「생선구잇집 이 씨」, 「감자밭 가계」 등 62편이 실렸다. 시가 향하는 자리는 화려한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 오래도록 불려 오지 못했던 마을과 노동과 가족의 자리다. 늦은 밤 외진 마을의 빨랫줄,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모의 발, 저수지 곁에서 생선을 굽는 사람의 절룩이는 다리 같은 이미지들이 시집 곳곳에 깊게 박혀 있다. 시인은 이런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조용히 드러낸다.
특히 이 시집의 서정은 과장되거나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고 닳은 일상의 표면을 오래 응시한 끝에 나온 문장들이라 더 오래 남는다. “어둠 속 빨래들 기다림으로 펄럭일까”라는 물음, “티눈으로 단단히 박힌” 뿌리의 가계라는 표현은 한 개인의 삶을 넘어 가족과 세대, 지역의 기억까지 한꺼번에 흔든다. 소박한 이미지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읽힌다.
시집의 중심에는 떠나온 자리와 남겨진 자리 사이의 감각이 놓여 있다. 이미 지나온 시간, 사라진 집, 오래전 떠나온 밭과 마을이 시 속에서는 다시 살아난다. 다만 그것은 복고적 향수로 머물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신산한 생이 남아 있고, 누대의 고통과 가난, 견딤의 시간이 함께 스며 있다. 시인은 그 상처를 덮지 않고, 그렇다고 거칠게 들추지도 않는다. 오래 말리지 못한 옷을 햇볕에 내어놓듯, 천천히 꺼내어 바람에 말린다.
표제작 「생선구잇집 이 씨」는 그런 시집의 결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생계를 위해 죽은 물고기를 구워야 하는 사람, 흐르지 못해 고인 감정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인물의 풍경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 초상처럼 읽힌다. “가물치 우는 밤”이라는 제목이 만들어내는 묵직한 울림도 여기서 비롯된다. 말로 다 드러나지 않는 감정과 고통이 물 밑에서 오래 숨 쉬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박춘희의 시는 오래된 서정이 여전히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로운 형식과 감각을 향한 문학의 움직임 속에서도, 사람의 삶을 오래 적셔 온 언어의 힘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마을 이름 하나, 나물 이름 하나, 사투리 한 자락까지 허투루 놓지 않는 시선은 잊힌 것들을 다시 불러내고, 그 부름을 통해 삶의 뿌리를 더듬게 만든다.
이 시집을 읽고 나면 저녁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어두워지는 시간이 아니라, 어두워짐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쉽게 지나쳤던 풍경과 오래 접어 두었던 마음의 자리가 다시 떠오르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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