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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필름처럼 되감기는 고향과 정년의 시간, 『오늘도 아날로그입니다만…』 출간(유경홍, 나무(도서출판))

30년 사서의 기억을 SNS 글에서 길어 올린, 한 사람의 ‘느린 삶’ 기록

장세환2025년 12월 26일 오후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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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날로그입니다만.jpg출판사 제공

디지털이 모든 것을 빠르게 바꾸는 시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속도를 늦추고, 사소한 하루를 손으로 만지듯 붙잡는다. 『오늘도 아날로그입니다만…』은 30여 년 도서관 사서로 일한 유경홍이 정년을 맞아, 고향과 가족, 계절과 일상을 돌아보며 적어 둔 짧은 글들을 엮은 에세이다. 거창한 성공담 대신, 오래된 기억의 질감으로 오늘을 버티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 책의 출발점은 ‘끝’이다. 정년이라는 표지판 앞에서 저자는 지나온 길을 한 번 더 천천히 훑는다. 강원도 정선에서 나고 자란 유년의 풍경, 라디오가 세상과 연결해 주던 시절, 반공 자막 하나에도 가슴을 졸이던 순수한 오해 같은 것들이 문장 사이로 스며든다. 저자는 스스로를 “그저 살아온 일기”라고 부르며, 과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간을 세운다. “문인의 감성은 부족해 그저 살아온 일기라 해두렵니다”라는 고백이 이 책의 톤을 결정한다.

구성은 다섯 갈래다. 첫 장은 고향을 향한 회귀다. 천렵의 기억, 강가의 바람, 사투리의 리듬, 부모님을 떠올리는 순간들이 촘촘히 놓인다. 두 번째 장은 계절을 따라 걷는다. 봄비, 여름 매미, 가을 은행나무와 겨울밤 같은 장면들이 한 장면씩 걸어 나온다. 세 번째 장은 ‘맛’과 ‘생활’의 기록이다. 고향만두, 강냉이, 청국장 같은 음식과 일상의 소소한 사건이 중장년의 시간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네 번째 장에서는 길 위의 풍경이 펼쳐진다. 동유럽, 터키, 제주 같은 여행의 장면이 ‘관광’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기억’으로 정리된다. 마지막 장은 세상과의 접촉면이다. 공중전화기, 장맛비, 한자 교육 같은 소재가 등장하고, 한 번쯤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오랜 사서의 시선은 결국 ‘책’과 ‘사람’으로 돌아온다. 생활의 표정 하나를 붙잡아 문장으로 옮기는 습관이 이 책 전체를 단단하게 묶는다.

추천글들이 말해 주는 이미지도 분명하다.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하다는 평처럼, 글은 화려하진 않아도 냄새와 소리, 온도를 남긴다. 한 추천사는 저자의 글을 “오래된 친구와 편안한 대화”에 비유한다. 사서로 살며 쌓인 시간, 농담과 유머, 그리고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겹쳐져 독자의 기억을 건드리는 방식이다. 디지털이 복제와 편집을 쉽게 해도, 아날로그는 잡음까지 포함해 ‘진짜였던 순간’을 보존한다는 저자의 관점이 책 제목 그대로 살아 있다.

빠른 시대에 느린 문장을 고집하며, 사라지기 쉬운 하루의 감정을 끝까지 건져 올린 기록이 『오늘도 아날로그입니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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