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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억의 곁에 머무는 언어,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박인, 다시문학)

탄생과 죽음, 사랑과 이별 ― 하루의 무게를 담은 시편들

장세환2026년 9월 8일 오후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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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앉아 있다.jpg출판사 제공

박인 시인의 새 시집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가 다시문학 다시 시인들 시리즈로 출간됐다. 이 시집은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탄생과 죽음, 사랑과 이별, 질병과 고통, 시간과 기억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탐구한다.

첫 시편 「작은방」은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본다. “엄마는 작은방에서 / 부엌칼로 탯줄을 끊었다 / 그 덕에 / 나는 이쪽으로 건너왔다” 생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작은방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장소로 다시 등장한다.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는 인간의 생애를 시인은 담담히 노래한다.

표제작 「천국의 아이」에서는 전쟁과 폭력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시든 꽃잎마다 / 말하지 못한 하루가 얹혀 있다” 죽은 아이의 이름을 돌 위에 새기며, 끝내 말하지 못한 하루들이 꽃잎 위에 쌓여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은 / 이미 끝났어야 했다”는 마지막 구절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이어진다.

「나의 본적」에서는 개인의 상처가 역사적 상처와 만난다. “나의 본적은 / 실향이 내린 뿌리” 실향민의 기억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이며, “평화가 철조망 너머에 있다면 / 나는 상처 난 몸으로도 / 그 길을 넘어가리라”는 구절은 분단과 평화의 문제를 시적 언어로 확장한다.

몸과 시간 역시 중요한 주제다. 「걷는 사람」에서 발은 “지구에 가장 먼저 닿는” 신체이며, 하루의 무게를 통과시키는 자리로 그려진다. 「병실에서」에서는 아픈 사람 곁에 있으면서도 그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울음조차 /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 빈 의자 아래 / 가만히 고인다”는 구절은 곁에 머무는 슬픔의 무게를 담아낸다.

사랑을 다룬 시편들에서는 후회와 깨달음이 중심에 놓인다. 「보내지 못한 봄」, 「돌아오지 않는 말」은 이미 지나가 버린 관계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바라보며, 사랑이란 상처와 후회 속에서도 끝내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내미는 일임을 보여준다.

한편 「AI 붓다」, 「TV 붓다」, 「인간 붓다」에서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기술이 인간의 언어와 지능을 대신하는 시대에도 남는 것은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편이다.

마지막 연작 「악기들의 은유법」은 음악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오보에」에서 오보에는 “동트는 고독의 숨결”이며 “새벽이 오고 있음을 먼저 알 뿐”이라는 구절은 크게 울지 않으면서도 다가오는 희망을 먼저 감지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든 꽃잎마다 하루가 얹혀 있다』는 슬픔을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과 상실의 곁에 오래 머물며, 그 안에 남아 있는 사랑과 기억을 바라본다. 시든 꽃잎 위에도 하루는 얹혀 있고, 그 하루를 살아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박인 시인의 시편들은 바로 그 하루의 흔적을 오래 들여다보며,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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