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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감각을 붙잡은 가장 초기의 하루키, 『오후의 마지막 잔디』(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잔디를 깎는 하루의 풍경 속에서 기억과 감각이 소설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 일러스트 픽션 북

장세환2026년 4월 23일 오후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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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마지막 잔디.jpg출판사 제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대표 단편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와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새롭게 묶였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1982년 잡지 <다카라지마>에 발표되고 이듬해 첫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에 수록된 동명 단편을 바탕으로, 1987년 잡지 <다테구미·요코구미>에 발표된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 20점을 함께 엮은 일러스트 픽션 북이다. 안자이 미즈마루 타계 10주기를 계기로 두 거장의 협업이 다시 한 권의 형태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번 출간은 단순한 재출간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장대한 사건보다 계절의 감각과 한 시절의 정서를 붙잡는 데 탁월한 하루키 문학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소설 속 ‘나’는 19살의 여름, 여자친구와 여행을 가기 위해 잔디 깎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 이별 편지를 받은 뒤에도 마지막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정원으로 향한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이 단편의 핵심은 사건보다 분위기에 있다. 지글지글 피부를 태우는 태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로큰롤, 길게 자란 잔디를 밀어내며 드러나는 초록빛 결, 그리고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시원한 촉감 같은 요소들이 촘촘히 쌓이며 소설 전체를 감각의 밀도로 채운다.

책 속 문장들은 하루키 특유의 초기 문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멀리멀리 가는 게 좋았다. 먼 곳의 정원에서 먼 곳의 잔디를 깎는 게 좋았다”는 문장은 이 단편의 정조를 정확히 압축한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노동과 이동, 그리고 그 안에서 문득 떠오르는 상실과 기억이 이 작품에서는 설명보다 리듬으로 전달된다. 하루키가 훗날 장편에서 확장해 나갈 고독, 부유감, 현실의 미세한 균열이 이미 이 짧은 단편 안에 응축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번 책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이다. 그는 오랜 세월 하루키와 호흡을 맞춘 예술가로, 이 작품에서도 텍스트를 단순히 장식하지 않고 소설의 온도를 시각적으로 번역해낸다. 경쾌하고도 청량한 그림들은 여름이라는 계절을 전면에 끌어오면서, 이야기 속 인물과 공간이 지닌 비현실적 어긋남까지 은근하게 드러낸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를 설명하기보다 같은 계절감 안에서 나란히 진동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삽화본이라기보다 글과 그림이 공동으로 완성한 한 권의 작품집에 가깝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시작점의 생동감을 다시 확인하게 하는 책이고, 처음 하루키를 접하는 독자에게는 그의 문학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가장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입문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 편의 단편이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예술과 만나 어떻게 새로운 물성을 얻는지를 증명하는 드문 사례다. 여름 한낮의 빛과 잔디의 결, 이별 직후의 허기와 멍한 청춘의 시선을 한 권에 붙잡아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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