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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여말선초를 한 시인의 눈으로 다시 건너다, 『운곡시사』(원천석, 한국문화사)
원천석의 시 1,146수를 오늘의 언어로 옮긴 이번 번역은 고려 말 지식인의 내면과 당대의 역사·생활 세계를 함께 복원한 대작이었다.
출판사 제공
『운곡시사』는 단순한 고전 시집의 재간행으로 보기 어려운 책이었다. 원천석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균열, 지방 지식인의 현실 감각, 그리고 시대를 통과하는 한 인간의 고뇌를 한꺼번에 마주하게 하는 방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번 책은 시 1,146수를 묶은 902쪽 분량의 대형 작업으로, 700년 전의 시적 언어를 오늘의 독서 공간으로 다시 불러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원천석은 여말선초를 살았지만 어느 왕조의 중심 권력에도 자신을 쉽게 얹지 않았던 인물로 소개된다. 치악산 기슭에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고, 시대의 변화를 지켜본 그의 삶은 흔히 알려진 충절의 상징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운곡시사』는 역사적 격변 한복판에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끝까지 붙든 지식인의 사유를 보여준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둘러싼 왜곡과 불의를 응시했다는 설명은, 이 시집이 단지 자연을 읊은 한시 선집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책의 가치가 더 커지는 이유는 시 한 편 한 편이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백성의 삶, 지역의 풍경, 이동의 경로까지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역시 이 책을 두고 “타임머신을 타고 700년 전 고려 말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설명하는데, 그 표현이 과장이 아니게 읽힌다. 원주를 기점으로 한 여정, 각 지역 주민의 삶, 현실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문학 텍스트인 동시에 인문지리와 생활사의 자료로도 기능한다.
이번 번역은 김은철, 김금숙이 맡았으며, 기존 번역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명과 지명을 다시 고증하고 각 작품에 고유번호를 부여했다고 한다. 고전을 읽는다는 일은 오래된 문장을 감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락되고 부식되고 흩어진 시간을 다시 엮어, 한 시대의 언어가 지금도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묻는 작업에 가깝다. 『운곡시사』는 바로 그 질문을 정면에서 수행하는 책이다. 고전이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인간과 역사, 지역과 진실의 문제를 새롭게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묵직한 번역본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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