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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늦춘 자리에 남는 질문, 『삶의 여백』 (백태수, 좋은땅)

산촌의 느린 일상과 고전 읽기 속에서 다시 묻는 인생 2막의 의미

최준혁2026년 3월 11일 오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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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jpg출판사 제공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많은 이에게 막막한 질문으로 남는다. 일에서 물러난 자리에 공허만 남는 것은 아닌지, 한때 치열하게 지나온 시간이 끝난 뒤 무엇으로 하루를 견딜 수 있을지 되묻게 된다. 『삶의 여백』은 바로 그 물음 앞에서 출발하는 산문집이다.

좋은땅에서 펴낸 이 산문집은 백두대간 대미산 자락에 머물며 살아가는 저자가 산촌의 느린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를 담는다. 도시의 속도와 경쟁을 지나온 뒤, 뒤안길처럼 보였던 시간이 오히려 삶을 다시 읽게 하는 자리로 바뀌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준다. 노년을 쇠퇴의 시간이 아니라 재해석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책 전반을 이끈다.

글은 거창한 선언보다 구체적인 장면에서 힘을 얻는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기억, 아내와 함께 걷는 산길, 미국 횡단 여행 중 만난 노부부, 콜롬비아 커피의 향, 저물녘 주흘산의 노을 같은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삶의 후반부를 바라보는 감각을 만든다. 빠름과 성취의 언어 대신 느림과 기다림, 머묾과 관조의 언어가 자리를 잡는다.

후반부에서는 고전 읽기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멜빌의 『모비 딕』, 카뮈의 『시지프 신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카프카의 『변신』, 프롬의 『사랑의 기술』 같은 작품을 매개로 집착과 부조리, 사랑과 윤리, 존재와 소외를 다시 들여다본다. 개인의 체험과 문학적 성찰을 한 줄로 잇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결국 『삶의 여백』이 붙드는 것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 시간이다. 인생의 뒤안길로 밀려난 듯한 자리에서도 사람은 다시 자신을 읽고, 관계를 돌아보고, 살아온 시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싶은 독자에게 오래 남는 문장을 건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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