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상세

newbooks

근대 성심리학의 출발점이 된 고전, 『모피를 입은 비너스』 출간(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을유문화사)

마조히즘 개념을 낳은 문제작, 권력과 욕망의 역학을 파고드는 독일 고전소설

장세환2025년 12월 11일 오후 3:40
1,096

모피를 입은 비너스.jpg출판사 제공

독일어권 고전 문학의 문제작으로 손꼽혀 온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장편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을유문화사에서 김재혁 번역으로 출간됐다. 1870년 발표 당시 당대의 성 관념과 도덕 규범에 정면으로 맞섰던 이 작품은 이후 정신의학과 철학, 문학 이론에까지 깊은 흔적을 남기며 근대 성심리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작가의 이름에서 유래한 ‘마조히즘’이라는 용어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이 지닌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한국어판은 원작의 서사와 긴장을 충실히 옮기면서 자허마조흐의 실제 계약서를 부록으로 수록해 작품과 현실이 뒤얽힌 문제의식을 함께 조명한다.

소설은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제국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젊은 귀족 제베린과 미망인 반다의 위험한 관계를 따라간다. 아름다운 여성의 노예가 되어 모욕과 고통을 받기를 갈망하는 제베린, 그런 욕망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점차 지배자의 역할에 빠져들어 가는 반다의 모습이 서로의 시선과 발화, 계약과 의식 같은 장치를 통해 세밀하게 그려진다. 두 사람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명문화한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이탈리아로 떠나 환상을 현실로 실험하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역할극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겉으로는 스캔들을 부를 만한 소재지만, 자허마조흐는 이를 통해 인간 욕망의 구조와 사회적 권력 관계가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핵심에는 남녀 간 권력 역학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자리한다. 작품은 화자가 모피를 두른 비너스 여신과 나누는 대화, 비너스 조각상에 대한 숭배 장면을 액자 구조로 배치하며 현실과 환상, 종교적 숭배와 성적 욕망의 경계를 흔든다. 남성이 여성의 신성한 아름다움 앞에 스스로를 복속시키는 장면들은 단순한 성적 취향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권력 구도를 전복해 보는 상상 실험처럼 읽힌다. 제베린의 욕망은 ‘지배하고 싶어 하는 남성’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여성의 절대적 권력을 상정하는 대신 그 관계가 결국 어떤 균열과 변형을 낳는지를 끝까지 추적한다. 반다 역시 처음에는 제베린의 제안에 당황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배자의 위치에서 느끼는 쾌감과 책임 사이에서 복잡하게 흔들리며 단선적인 악역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마조히즘을 둘러싼 사유의 기원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신과 의사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은 『성의 병리학』에서 이 작품을 바탕으로 피학적 성향을 가리키는 ‘마조히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이후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이라는 저서에서 자허마조흐의 세계를 사디즘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체계로 읽어냈다. 들뢰즈가 강조하듯, 마조히즘은 고통 자체를 즐기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계약과 규칙, 연기와 반복을 통해 고통을 통제하고 의미화하려는 복합적인 구조를 지닌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피, 채찍, 계약서 등 상징들은 자극적인 소품에 그치지 않고, 욕망과 법, 쾌락과 책임,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을 환기시키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자허마조흐의 삶과 작품이 이처럼 맞물려 있다는 점 또한 독서 경험에 독특한 긴장감을 더한다.

이번 한국어판은 자허마조흐의 문장을 우리말의 리듬과 정서에 맞게 옮기는 데 집중한 번역과 더불어, 작품의 철학적·정신분석적 맥락을 안내하는 해설, 판본 소개, 연보 등을 충실히 실었다. 특히 작가가 실제 연인과 맺은 계약서를 부록으로 실어,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마조히즘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장되었는지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번역을 맡은 김재혁 번역가는 독일 문학과 시학 연구를 바탕으로 고전 텍스트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재현하면서도, 오늘의 독자가 읽기 쉬운 문장으로 다듬어 읽는 부담을 줄였다.

한때 도덕적 비난과 도착적인 스캔들의 대상으로 소비되었던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오늘날 다시 읽을 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가 된다. 사랑과 지배, 복종과 자유, 쾌락과 폭력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관계 속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타인을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을유문화사의 이번 판본은 고전의 자리를 다시 묻는 작업이자, 권력과 욕망을 둘러싼 오래된 질문들을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사유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관련 기사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6월 10일 오후 3:56
8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6월 10일 오후 3:52
11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6월 10일 오후 3:45
8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