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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비밀의 들판』(마거릿 주혜 리, 한겨레출판)

잊힌 독립운동가를 추적하는 손녀의 기록, 가족의 비밀과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복원하다

장세환2026년 8월 1일 오후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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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jpg한 가족의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은 어디까지 역사를 복원할 수 있을까. 『비밀의 들판』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가는 손녀의 여정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과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흔을 동시에 비추는 작품이다.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연구소 펠로십과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학 연구 펠로십에 선정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마거릿 주혜 리는 이 책에서 침묵으로 덮인 가족사와 국가의 역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197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자란 저자는 늘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안고 살아왔다. 그 질문의 중심에는 가족이 철저히 함구한 한 인물이 있었다. 전과자였고 집안의 수치로만 알려졌던 할아버지다. 하지만 성인이 된 저자가 아버지의 미완의 조사 작업을 이어받아 취재를 시작하면서 침묵의 실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저자가 복원해낸 할아버지 이철하는 일제강점기 충남 공주 지역에서 항일 동맹휴학과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가였다. 그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비밀결사 활동을 벌였고,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반공 체제를 거치면서 그의 삶은 역사에서 지워졌고 가족에게는 위험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책이 특별한 이유는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데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찾으려는 진실만큼이나 왜 그 진실이 사라졌는가를 추적한다. 남편이 남긴 서류와 편지, 정치 관련 기록을 직접 불태웠던 할머니는 역사를 숨긴 사람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해야 했던 시대의 증인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안전했던 시대가 있었고, 그 침묵은 자식과 손주 세대에게까지 유산처럼 이어졌다.

『비밀의 들판』 곳곳에는 역사적 공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중요한 독립운동 자료가 먼지 쌓인 개인 주택에 방치되어 있거나, 누군가의 정치적 이력이 가족 전체를 위협할 수 있었던 시대의 풍경은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책은 기록된 역사보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에 주목하며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묻는다.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자신 안의 공허함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해진 역사적 침묵의 결과였음을 깨닫는다. 할머니에게 과거를 지우는 일이 생존을 위한 조건이었다면 손녀인 저자에게는 그 과거를 되찾는 일이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된다. 결국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은 곧 자기 자신을 복원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오랜 추적 끝에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의 독립운동 사실을 밝혀내고, 그는 사후 60여 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지워졌던 이름은 다시 역사 속에 기록되고, 가족은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 그 과정은 한 독립운동가의 명예 회복인 동시에 한 가족이 오랫동안 품어온 상실과 침묵을 치유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거릿 주혜 리는 《더 네이션》 문학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다양한 매체에 기사와 비평을 기고해왔다. 《비밀의 들판》은 2024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선정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책은 독립운동사와 가족사, 이민자 정체성,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한데 엮어내며 독자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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