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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 한 알이 바꾼 세계사”, 『향신료의 역사』 (미셸 발라르, 비)
중세 세계를 움직인 욕망과 교역의 흐름을 따라간 향신료 문명사
출판사 제공
중세 유럽 사람들은 향신료가 어디에서 오는지 몰랐다. 누군가는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왔다고 믿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동방 어딘가의 전설 속 왕국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향신료의 역사』는 그 신비로운 물질이 어떻게 세계를 움직였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도서출판 비에서 출간한 이번 책은 프랑스 중세사 권위자 미셸 발라르의 연구서를 국내 처음 완역한 것이다. 저자는 상업 실무서와 회계장부, 요리서와 약제서 등 방대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중세 향신료 교역의 흐름을 복원한다.
책은 중국과 인도, 말레이 제도에서 시작된 향신료가 인도양과 실크로드, 홍해와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아랍 상인과 베네치아, 제노바, 카탈루냐 상인들이 구축한 교역망과 동서 문명이 교차하던 중세 해상 네트워크도 함께 드러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향신료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후추와 계피, 정향과 육두구는 식탁을 넘어 약재와 향료, 염색 재료, 화장품, 심지어 시신 방부 처리에도 사용됐다. 당시 향신료는 부와 권력, 사회적 위계를 상징하는 귀중품이기도 했다.
책은 중세 유럽의 식문화도 세밀하게 다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이베리아와 잉글랜드 등 각 지역 요리서에 나타난 향신료 사용 방식의 차이를 비교하며, 향신료 소비가 계층과 지역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분석한다.
약재로서의 역할을 다룬 부분도 눈에 띈다. 당시 사람들은 향신료를 단순히 맛을 내는 재료보다 건강과 질병 치료를 위한 물질로 더 중요하게 여겼다. 향초와 조미료, 향신료는 통증 완화와 질병 치료에 널리 쓰였고, 병원과 수도원에서도 중요한 약재로 취급됐다.
후반부에서는 향신료를 둘러싼 욕망이 결국 항로 개척과 해양 기술 혁신, 근대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이어졌다고 짚는다. 향신료 무역은 단순한 상품 거래가 아니라 중세 세계 질서를 재편한 거대한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미셸 발라르는 파리 제1대학 중세사 명예교수로, 십자군과 중세 지중해 교역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다. 이번 번역은 연세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연구한 강형식 교수가 맡았다.
『향신료의 역사』는 음식 문화사를 넘어 중세 세계 경제와 권력, 교역과 욕망의 흐름까지 함께 읽어내는 인문 교양서다. 후추와 계피의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세 세계사의 중심부에 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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