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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미술사, 『노마드의 미적상상력』 신간 (권영필·MAM Press)

스키타이 미술을 통해 본 이동하는 세계의 미학적 언어

장세환2026년 4월 29일 오후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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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의 미적 상상력.jpg출판사 제공

『노마드의 미적상상력』은 정주 문명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미술사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기원전 9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 특히 스키타이인의 미술을 통해 ‘이동하는 세계’가 어떤 미학적 언어를 만들어 왔는지를 탐구한다.

저자 권영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로,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미술 연구를 통해 동서 문명 교류의 미학을 오랫동안 탐구해 온 미술사학자다. 『노마드의 미적상상력』은 1975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스키타이 전시에서 받은 전율을 출발점으로, 약 50년에 걸친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스키타이 미술 단행본이라는 점에서도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

스키타이인들은 신전이나 거대한 기념비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말의 굴레와 마구, 단검의 칼집, 의복의 단추 위에 새겨진 작은 황금 장식들을 남겼다. 사슴의 하체가 180도로 뒤틀려 하늘로 솟구치고, 그리핀과 표범이 맞물린 채 긴장을 이루는 동물 양식(Animal Style)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를 시각화한 유목민의 미학적 표현이었다.

이 책은 스키타이를 ‘문자 없는 야만적 유목민’으로 규정해 온 서구 중심의 시선을 비판한다.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아시리아 설형문자 사료와 투바 공화국 아르잔 고분 발굴 자료를 직접 분석하며 스키타이의 역사적 실체를 복원한다. 이를 통해 스키타이가 역사의 그늘이 아니라 유라시아 문명 교류의 핵심 무대에 있었음을 드러낸다.

『노마드의 미적상상력』의 또 다른 특징은 미학 이론과 고고미술의 결합이다. 권영필은 칸트의 미적 상상력, 헤겔의 상징 미술론, 보링거의 추상론, 들뢰즈의 노마드 미학을 스키타이 미술 해석에 적용한다. 추상적인 철학 개념은 구체적인 황금 유물과 만나며, 고대 미술은 현대 미학의 언어로 다시 읽힌다.

특히 사슴의 하체가 뒤틀리며 하늘로 솟구치는 표현, 새머리가 동물의 예기치 않은 부위에서 돌출되는 형상, 두 동물의 목이 맞물리는 구도 등은 ‘미적 상상력’이 작동한 결과로 분석된다. 이는 고정된 형태를 지향하는 정주 미학과 대비되는, 비정주적 세계 인식의 산물로 제시된다.

이 책은 스키타이 미술의 영향이 유라시아 초원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고대 한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동물 양식 유물들을 추적하며, 경주 황남대총의 황금 유물과 스키타이 미술 사이의 연관성도 학술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 스키타이 미학이 동아시아 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 역시 구체화된다.

부록에 수록된 「스키티아니즘과 러시아 프리미티비즘」은 이 책의 또 다른 핵심이다. 저자는 칸딘스키의 기마 인물 주제를 분석하며, 현대 추상 미술의 출발점으로 알려진 이미지의 뿌리가 스키타이 동물 양식에 있음을 논증한다. 이는 서구 현대 미술의 기원을 유라시아 초원으로 확장하는 도발적인 시도다.

『노마드의 미적상상력』은 고대 미술사 연구서이면서 동시에 방법론적 도전이다. 이 책은 미술사를 기록 중심, 정주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 이동과 생성, 운동성의 미학으로 재구성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학은 기록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자의 것이었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고정된 체계와 경계가 흔들리는 시대에, 이 책은 유목적 상상력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지도처럼 제시한다. 『노마드의 미적상상력』은 스키타이 미술을 통해 미술사와 문화사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밀도 높은 학술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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