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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앞둔 시간의 초상, 『해방전』 신간 (하창수·청색종이)

오지 않은 해방 앞에서 흔들리며 견딘 사람들의 기록

장세환2026년 4월 29일 오후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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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jpg출판사 제공

하창수의 장편소설 『해방전』은 해방의 순간이 아니라, 해방에 이르기 전의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염상섭의 『만세전』을 의식적으로 호출하면서도, 그 서사의 방향을 3·1운동 이전이 아니라 ‘해방 이전’이라는 미완의 시간으로 옮겨 놓는다. 해방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견뎠는가라는 질문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다.

『해방전』은 아직 오지 않은 해방을 앞두고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기록이다. 작가는 해방을 하나의 완결된 역사적 사건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해방을 기다리는 시간, 혹은 해방이라는 말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국면을 인간의 관계와 기억의 층위에서 풀어낸다. 그 시간은 가장 어둡고도 치열한 국면으로 제시된다.

소설의 중심에는 김지량과 박창익이라는 두 인물이 있다. 오사카 항만청 주사로 일하며 기민하게 현실을 넘나드는 박창익과, 금융조합에서 실력을 쌓으며 기회를 엿보는 김지량은 의리와 연대로 묶여 있다. 이들의 관계는 작품의 가장 역동적인 축을 형성하며, 식민지 현실 속에서 생존과 선택이 어떻게 엇갈리는지를 보여 준다.

특히 김지량의 서사는 작가가 아버지의 유품으로 남긴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다. 사진 속 인물의 정체를 끝내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기억의 공백’에서 시작되었음을 드러낸다. 『해방전』은 이 공백을 김지량과 박창익이라는 두 인물로 재구성하며, 사적인 기억을 서사의 동력으로 전환한다.

이 관계의 이면에는 저항의 기억이 놓여 있다. 김성학, 곧 훗날 김지량이 되는 인물이 일본인 지식인 오오모리 소슈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삼촌 김항섭의 궁성 폭탄 투척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실재했던 이 사건은 모두 불발로 끝나지만, 소설 속에서는 이후의 삶에 스며드는 기억으로 기능한다. 저항은 현장의 영웅담이 아니라, 한 세대의 행위가 다음 세대의 내면으로 남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또 다른 축에는 엄순임과 오오모리 소슈 부부가 있다.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는 일본인 지식인 오오모리와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지키는 순임의 존재는, 식민지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사유와 윤리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사유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엄정임과 후지이 마키의 관계는 단절 이후에도 이어지는 감정의 지속을 상징한다. 재회의 장면은 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사적인 유대가 끝내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며, 이 소설이 거대한 이념보다 인간적 관계에 주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작품은 바다의 목소리로 문을 연다. 제주 방언으로 들려오는 이 말은 바다가 무한히 펼쳐진 공간이면서도 언젠가 해변에 닿게 되는 운명을 동시에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해방전』에서 바다는 낭만적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무심한 질서로 작동한다. 이는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과 겹쳐진다.

언어 역시 이 소설의 중요한 층위다. 제주어, 조선어, 일본어가 교차하며 인물들의 위치와 정체성이 드러난다. 발음과 말 한마디가 생존과 직결되는 장면들은, 언어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해방전』에는 QR 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네 곡의 OST가 포함돼 있다. 이 음악은 텍스트를 설명하기보다, 독서 이후 남는 정조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 OST가 작가의 아들이자 뮤지션인 하운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은, 한 세대의 서사가 다른 세대의 감각으로 이어진다는 이 소설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해방전』은 해방을 재현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이 붙잡는 것은 해방 직전의 시간, 아직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상태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붙들고 견뎠는가이다. 『해방전』은 해방이라는 사건 이전의 시간을 통해, 개인의 이름과 관계,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어떻게 역사의 일부가 되는지를 묻는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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