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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다 여겨진 것들이 결국 삶을 지탱한다 『쓸모없음의 쓸모』 신간 (유명종 | 디스커버리미디어)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 ‘무용함’으로 삶의 균형을 되묻는 사유의 산문집

장세환2026년 4월 24일 오후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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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쓸모.jpg출판사 제공

어느 순간, 문장을 읽다 멈추게 되는 책이 있다.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문장 밖으로 나와 자기 삶의 골목을 배회하게 만드는 책. 『쓸모없음의 쓸모』는 바로 그런 산문집이다. 유명종 작가는 이 책에서 속도·경쟁·효율이 삶의 기준이 된 세계 한복판에서, 기꺼이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이 책이 말하는 ‘쓸모없음’은 단순한 무용(無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대 사회가 가장 먼저 버려 온 가치들—느림, 여백, 슬픔, 다정함, 흔들림—에 대한 재발견이다. 생산성과 성과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총 67편의 산문, 약 3,600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SNS에서 먼저 호응을 얻은 글들이 책으로 엮였지만, 이 책은 가볍게 소비되길 거부한다. 작가는 독자를 설득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풍경을 조용히 펼쳐 보이며 장면 속으로 초대한다. 독자는 설명 대신 체험하게 되고, 결론 대신 질문을 품게 된다.

이 책의 1장은 작가의 미학적 선언에 가깝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을 좋아하오」라는 문장은 책 전체의 기조를 단번에 드러낸다. 작가는 큰 뜻이나 거창한 목적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것 앞에서 흔들리는 감각, 느림과 여백을 사랑하는 태도를 정직하게 고백한다. 무용한 기호들이야말로 삶을 숨 쉬게 한다는 인식은, 효율에 익숙한 독자에게 조용한 균열을 만든다.

유명종의 산문은 시적이지만 추상에 머물지 않는다. 숲과 동백꽃, 제주 오름과 종묘, 부석사 같은 구체적인 장소와 사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 자연과 공간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유의 촉발점이다. 작가는 걷기와 머무름, 기다림과 비움을 통해 세계를 다시 인식하게 만든다. “자동차는 세계를 관람하게 하고, 걷기는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는 문장은 그의 시선을 집약한다.

2장에서 사랑과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물성으로 다루어진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오감으로 느끼고 교감할 때 실현된다”라는 문장은, 사랑을 정의하려는 수많은 문장들과 거리를 둔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사유 역시 감정적 과잉 없이 담담하다. “죽음은 산 자의 몫”이라는 반복되는 진술은, 상실 이후에 남겨진 이들이 짊어져야 할 시간의 무게를 정확히 짚는다.

이 책이 특별한 지점은 슬픔을 회피하지 않는 방식에 있다.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풍경으로 제시된다. 해남 매화밭에서 느낀 ‘화사한 슬픔’, 기다림을 동사로 재정의하는 사유, 그리움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감정이라는 통찰은, 감정을 관리하거나 통제하려는 현대적 태도와 분명히 결을 달리한다.

3장 「감정의 기하학」에서는 마음의 움직임을 수학적 은유로 풀어낸다. 손을 잡지 못한 밤, 외로움을 이기는 기술, 결핍의 힘 같은 제목들은 감정이 결코 직선으로 흐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결핍은 채워야 할 공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추진력이라는 관점은 이 책 전반에서 반복해서 변주된다.

4장에 이르면 ‘비우는 것’에 대한 사유가 본격화된다. 적을수록 많은 것, 비워서 모두를 얻는 역설. 유명종은 비움을 미덕으로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공간·건축·디자인·문화유산을 통해 구체화한다. 부석사를 “한 편의 소설”로, 수원화성을 “조선의 UX 디자인”으로 읽어내는 대목은, 그의 문화적 사유가 얼마나 생활 감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힐링 에세이라는 범주에 쉬이 포섭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위로하지 않고, 긍정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읽는 이를 멈춰 세우고,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의 위로는 문장 속에 드러나기보다, 독자의 해석 과정에서 발생한다. “위로하지 않지만 위로가 된다”는 독자 반응은 이런 방식의 결과다.

유명종은 시인이자 문화 평론가로, 오랜 편집자 경험을 거쳐왔다. 이력은 화려하지만, 책에서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자리와 낮은 곳,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고집스럽게 머문다. 큰 이야기를 피하고 작은 감각을 붙잡는 태도는, 이 책이 말하는 ‘쓸모없음’의 윤리와 정확히 겹친다.

이 산문집의 문장들은 한 번 읽고 지나가기 어렵다. 읽다가 멈추고, 표시하고, 다시 펼치게 된다. 삶의 리듬이 깨질 때마다 곁에 두고 다시 읽게 되는 책에 가깝다. 작가가 마지막에서 말하는 ‘근사한 조난’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삶의 지도를 얻는 경험이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묻는다. 우리가 삶에서 유용하다고 믿어온 기준들은 정말 충분한가. 속도와 효율 바깥으로 나가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가. 이 책은 대답 대신 풍경을 내어준다. 그 풍경 안에서 독자는 각자의 속도로 경험하고, 각자의 언어로 다시 삶을 정의하게 된다.

질주의 세계에서 한 발 물러나고 싶은 독자, 사유의 호흡을 회복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조용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된다. 쓸모없다 여겨진 것들이 결국 끝까지 남아 삶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이 산문집은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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