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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을 선택의 문제로 바꾼 사유의 역사, 『태어나는 문제』(에릭 L. 피터슨, 낮은산)

우생학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학·정치·일상의 판단 속에서 되살아나는 ‘선택의 논리’

장세환2026년 4월 23일 오후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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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문제.jpg출판사 제공

인간은 어떤 기준으로 태어남을 판단하는가. 『태어나는 문제』는 이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끌어올리며, ‘좋은 유전자’와 ‘나쁜 유전자’를 구분하려는 사고가 어떻게 형성되고 제도화되어 왔는지를 추적한 사회과학서다.

이 책은 우생학을 단순히 나치 독일의 극단적 폭력이나 과거의 오류로 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개인의 욕망,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는 정책 판단, 그리고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합리적 계산 속에서 반복되어온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확장해 해석한다. 저자 에릭 L. 피터슨은 우생학이 비정상적인 광기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문제의 뿌리를 더 깊은 층위로 끌어내린다.

서술은 고대 그리스의 선별적 번식 논의에서 시작해, 19세기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 개념 정립,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에서의 제도화 과정을 거쳐 나치 독일의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발전한 우생학 담론이 독일로 유입되어 정책화되는 과정은, 이 사상이 특정 국가의 일탈이 아니라 국제적 지식 네트워크 속에서 확산된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과학’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판단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작동한다. 범죄자의 뇌 구조를 분석해 유전적 결함을 찾으려 했던 시도, 특정 인종과 계층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려는 연구들은 과학적 객관성을 가장하면서도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과학과 권력, 도덕이 결합될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이 책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현재’다. 우생학은 사라진 사상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검사, 생명공학 기술, 출생 전 진단과 같은 현대의 선택 구조는 더 이상 국가가 강제하지 않아도 개인 스스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른바 ‘벨벳 우생학’이라 불리는 흐름은 강압 대신 합리성을 앞세우지만, 특정 삶을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누가 태어날 자격을 갖는가.” 그러나 그 질문이 향하는 방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떤 삶을 허용하고 어떤 삶을 배제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윤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문제』는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선택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더 정교한 배제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선택의 기준을 다시 묻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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