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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 다시 기록되는 한 여성의 권력과 선택 『지워진 대한제국 황후』 (권현숙, 기파랑)

궁녀에서 황귀비로, 역사 속 여성의 행보를 복원한 장편소설

장세환2026년 4월 20일 오후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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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대한제국 황후.jpg출판사 제공

대한제국의 역사에는 분명 존재했지만 제대로 불리지 못한 이름들이 있다. 『지워진 대한제국 황후』는 그중 한 인물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미천한 궁녀로 시작해 황귀비의 자리에 오른 순헌황귀비 엄씨의 삶을 중심으로, 격변기의 조선과 대한제국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소설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선 개인의 선택과 전략에 주목한다. 엄씨는 화려한 배경도, 절대적인 권력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궁중의 질서와 권력 구도를 읽어내며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간다. 단순한 상승 서사가 아니라, 위태로운 권력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움직이는 과정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특히 아관파천을 둘러싼 장면은 이야기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핵심 축이다. 고종을 궁 밖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펼쳐지는 은밀한 작전과 기지, 그리고 실패할 경우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의 선택들이 빠른 호흡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첩보극에 가까운 긴박감이 살아난다.

작품은 궁중 권력 투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엄씨를 정치적 동반자이자 교육의 선각자로 확장해 바라본다. 내탕금을 활용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쏟는 모습은, 한 인물이 단순히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을 넘어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지점까지 보여준다.

권현숙 작가는 방대한 시대 배경을 빠른 전개와 선명한 장면으로 풀어낸다. 역사적 사실 위에 상상력을 더해, 기록 속에서 희미해진 인물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호흡하게 만든다. 읽는 동안 시간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 하나가 남는다.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은 왜 사라졌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가. 그 물음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시선까지 조용히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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