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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시간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이름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있다. 『텃밭의 시간』은 그 사라질 듯한 순간들을 붙잡아 기록으로 남긴 한 인문활동가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화려한 사건이나 중심 인물보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과 공간을 따라가며 삶의 결을 천천히 되짚는다.
이 책은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인문 기록 에세이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장소와 인물, 기억이 교차하며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의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개인의 체험이 곧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저자 정문숙은 오랜 시간 글쓰기와 인문학 교육 현장에서 활동해온 작가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지역 문화원과 공공기관에서 강의와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을 기록하는 글쓰기’를 실천해왔다. 부산문화재단 지원사업 선정, 문학상 수상 경력 등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지속적인 창작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인문 기록자라는 점이 이 책의 중요한 뿌리다.
작품에는 임진왜란과 독립운동의 흔적, 오래된 마을과 사람들의 삶, 그리고 오늘의 일상까지 다양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특히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들, 잊혀 가는 장소들에 대한 기록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 남기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힘은 바로 그 기록의 절박함이다.
문장은 담백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상처와 기억, 그리고 공동체의 시간은 쉽게 소비되지 않는 방식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꽃과 텃밭, 계절이라는 자연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인간의 삶 또한 결국 시간을 견디며 피고 지는 과정임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텃밭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 속에서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책이다.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이야기들, 말해지지 않으면 잊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 역시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고, 중심에 서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아 기록되는 순간, 그 삶은 이미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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