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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유혹을 끝내 놓지 않는 단편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통과한 시선으로 문명의 위선과 인간의 양면성을 비트는 대표 단편 16편

장세환2026년 1월 16일 오후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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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jpg출판사 제공

누군가는 세상을 문명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 문명 속에서 더 정교해진 잔혹함을 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로맹 가리가 평생 붙들고 늘어졌던 질문, 인간은 어디까지 고결해질 수 있는가를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단편집이다. 공쿠르상을 두 차례 받은 유일한 작가라는 수식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책의 힘은 상보다 경험에 가깝다. 전쟁과 폭력의 시간을 몸으로 지나온 작가가 문명화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위선, 자기기만, 자기중심성을 서늘한 위트와 아이러니로 끌어올린다.

책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16편이 실렸다. 흥행작을 나열하듯 작품을 늘어놓기보다, 각 단편은 서로 다른 장면에서 같은 본질을 겨눈다. 폭력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휴머니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냉혹한 계산,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다. 작가는 인간을 불신하는 듯 보이면서도, 마지막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손을 놓지 않는다. “인간의 문제, 그것은 모두가 연루되는 치사한 역사다” 같은 문장은 냉소처럼 들리지만, 그 냉소가 끝까지 가 버리면 남는 것은 폐허뿐이라는 걸 그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인지 절망의 끝에서도 삶을 다시 붙들게 하는 작은 힘, “희망의 유혹”을 이야기의 심장부에 남겨 둔다.

이 단편집은 읽는 속도를 자꾸 늦춘다. 장면은 가볍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웃음은 곧바로 씁쓸함으로 뒤집힌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쉽게 재단하려는 독자의 습관을 흔들고, ‘좋은 말’로 포장된 세계가 실제로 누구를 다치게 하는지 다시 묻게 만든다. 오래된 이야기들이 지금도 살아남는 이유는, 그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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