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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바깥에서 시작해 무대 위에서 완성된 공동체, 『연극하는 날』 출간(노여래, 극단연필통, 걷는사람)

노숙인 센터 이용자들이 만든 아마추어 극단 ‘연필통’ 13년의 시간을 기록한 다큐 에세이

장세환2026년 1월 15일 오전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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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하는 날.jpg출판사 제공

연극은 가끔 지붕이 된다. 집이 없던 사람에게는 진짜 지붕처럼, 마음 둘 곳 없던 사람에게는 잠시라도 숨을 고르는 천장처럼. 『연극하는 날』은 서울역 인근 노숙인 센터 이용자들이 결성한 아마추어 극단 ‘연필통’이 지난 13년간 걸어온 시간을 따라가는 다큐 에세이다. 다큐멘터리 구성 작가이자 독립 영화 감독으로 활동해온 노여래가 극단 연필통과 함께 써 내려가며, 무대의 빛보다 무대 밖의 시간에 더 오래 머문다. 연습실과 쪽방, 거리와 공연장을 오가며 “사람이 사람을 붙잡는 방식”이 어떻게 하나의 공연이 되는지를 기록한다.

이야기는 2012년, 삶이 너무 쉽게 흩어지던 자리에서 시작한다. 단원들은 처음부터 ‘연필통’이라는 이름을 두고 토론한다. 언론은 그들을 편하게 “노숙인 극단”이라 부르지만, 당사자들은 그 딱지 안에서 자기 삶이 단순화되는 느낌을 견디기 어렵다. “우리가 지금 노숙인이야?”라는 질문이 튀어나오는 대목에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 정체성과 존엄의 문제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이름을 붙이는 일이 곧 삶을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만든다는 건 역할을 나누는 일이지만, 이들에게는 더 자주 “자리를 지키는 일”로 나타난다. 생계가 무너질 때 연습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하는 일정이 되고, 관계가 틀어질 때는 무대가 아니라 현실에서 먼저 퇴장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책 속에는 ‘사람들이 떠나고’라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울린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들이 다시 무대 쪽으로 몸을 돌리는 이유는 거창한 예술적 사명감이 아니라, 여기만큼은 서로를 사람으로 대하는 방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너를 받아 준 사람들이잖아”라는 말이 단원의 귀에 박히는 순간, 연극은 취미가 아니라 소속감의 기술이 된다.

책은 공연 준비의 드라마를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순간들을 붙잡는다. 서울역 대합실 의자에 앉을 자격을 묻는 대사,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남는 마음, 누군가의 사라짐이 남긴 빈자리, 그리고 돌아온 사람을 고맙게 받아 주자는 말. 삶은 늘 즉흥인데, 연극은 그 즉흥을 견디게 해주는 규칙을 만든다. “탐험의 규칙” 같은 장치가 단지 이야기의 재미를 위한 설정이 아니라,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약속처럼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극하는 날』은 예술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이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된 동명 다큐의 뒷이야기까지 이어지며, 한 번의 공연이 끝나도 관계와 기억은 다른 형식으로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 책은 연극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떻게 성립하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지에 대한 생활의 기록이다.

무대는 잠깐이지만, 누군가를 끝까지 기다려 주는 시간은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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