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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묵은 지네의 한을 품은 사랑 이야기, 『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 출간(배삼식, 비룡소)
극작가 배삼식, 첫 전래동화 그림책으로 천 년 묵은 지네 설화를 다시 깨우다
출판사 제공
레코드가 아닌 이야기 무대에서 활약해 온 극작가 배삼식이 이번에는 어린이 독자를 향해 무대를 옮겼다. 비룡소 전래동화 시리즈 신간 『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은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천 년 묵은 지네’ 설화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빚어낸 그림책이다. 양장본 72쪽, 위로 넘기는 독특한 판형 속에 글과 그림을 넉넉히 담아, 초등 저학년부터 어른 독자까지 함께 읽을 수 있는 전래동화로 선보인다. 글은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이, 그림은 한국적 미감으로 주목받아 온 일러스트레이터 김세현이 맡았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왼쪽 눈이 도라지꽃처럼 새파란 총각이다. 마을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 못한 채 산속으로 숨어든 총각 앞에 어느 날 두 손이 빠알간 각시가 나타난다. 사람의 모습으로 서 있지만, 실은 천 년 묵은 지네의 혼을 품은 존재다.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알아보는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도라지꽃처럼 새파란 눈이, 예쁘기만 한걸”이라는 짧은 고백 속에는 타인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담긴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된 원한을 품고 지렁이의 형상으로 다시 나타난 토룡 대사가 지네 각시의 과거를 폭로하면서, 총각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정체와 마주서야 한다. 토룡 대사는 총각에게 먼저 공격해 지네를 제압하라고 부추기지만, 총각은 끝내 칼을 들지 못한다. 지네여도, 괴물이더라도 이미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지렁이와 지네가 뒤엉켜 싸우는 동안 총각은 “슬프다, 지네도 지렁이도 슬프구나”라고 울부짖으며 끝없이 되풀이된 원한의 고리를 바라본다. 두 존재의 싸움은 선악의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얽어맨 슬픔을 풀어내는 의식에 가깝다.
배삼식의 문장은 전래담 특유의 입말 리듬을 살리면서도 인물의 마음결을 섬세하게 비춘다. 삼 사 어구가 이어지는 문장, 되풀이되는 말맛 덕분에 소리를 내어 읽으면 마치 마당극 대사를 듣는 듯한 재미가 살아난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결론 대신, 지네 각시와 도라지 총각, 토룡 대사가 각자의 사연과 논리를 갖춘 인물로 서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나와 다른 존재를 끝까지 이해해 보려는 시선, 원한의 연쇄를 끊어 내려는 눈물 섞인 선택은 오늘의 어린 독자에게도 곱씹을 여지를 남긴다.
김세현의 그림은 한국 전통 회화의 질감과 현대적인 절제를 함께 담아냈다. 황토를 바른 장지 위에 먹과 호분, 청과 적의 채색을 얹어 지네 각시의 빠알간 손, 도라지 눈을 품은 총각의 얼굴, 용처럼 꿈틀거리는 토룡 대사의 형상을 강렬하게 그려 낸다. 여백을 넉넉히 둔 화면 구성 덕분에 한 장 한 장이 독립된 그림 작품처럼 감상되며, 책을 위로 펼치는 세로 제본은 긴 서사를 천천히 끌어올리듯 넘겨 보게 만든다. 글을 다 읽은 뒤에도 다시 그림만 따라가며 이야기를 되새기기 좋은 구조다.
『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은 어린이에게는 다름과 두려움을 대하는 법을, 어른에게는 오래된 원한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건네는 그림책이다. 도라지꽃 하나, 지네의 빨간 손 하나에도 서사가 배어 있는 글과 그림은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기 좋은 소재가 된다. 전통 설화를 그대로 되풀이하기보다, 그 안에서 오늘 우리가 새로 꺼내 읽을 감정을 찾아내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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