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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출간(세라 베이크, 다산초당)

전쟁과 혐오, 기술의 시대에 다시 묻는 인간다움의 조건

장세환2025년 12월 14일 오후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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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jpg출판사 제공

단절과 냉소의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마음을 일깨우는 인문 에세이가 나왔다. 세라 베이크웰의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약 700년에 걸친 사유의 역사를 따라가며, 인종과 성별과 계급을 넘어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해 온 휴머니스트들의 삶을 한 권에 담았다. 버락 오바마가 2023년의 책으로 꼽고, 뉴욕타임스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화제작이자, 오늘 한국 독자에게는 “지금 왜 다시 인간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두꺼운 지도다.

페스트와 전쟁, 전체주의와 인종차별을 통과한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을까. 세라 베이크월은 14세기 페트라르카에서 20세기 버트런드 러셀과 조라 닐 허스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얼굴을 지키려 했던 사상가와 시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휴머니즘을 다시 정의한다. 이 책에서 휴머니즘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인간을 향해 고개를 드는 태도,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려는 실천으로 그려진다. 652쪽의 분량 속에 응축된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서 출발한다. 고전 텍스트를 찾아 옮겨 적고, 필사본 한 장을 위해 평생을 바치던 학자들의 집요한 열정은 인간을 다시 사유의 중심으로 불러낸 첫 시도였다. 이어 계몽기와 과학혁명의 시대에는 흄과 다윈, 볼테르 등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인간의 몸과 정신을 해부하며 “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세계 이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밀고 나간다. 베이크월은 이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대신 생각의 흐름과 질문의 계보를 따라 엮어, 철학사이자 지성사이자 인간탐구의 서사로 재구성한다.

저자는 휴머니즘을, 어떤 사상을 신조처럼 믿는 일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에게 끊임없이 다시 집중하려는 습관이라고 설명한다. 신이나 국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지워질 때마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삶과 행복이 먼저”라는 말을 반복해 왔다. 전쟁과 독재, 종교적 탄압 속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지키려 했던 글쓰기와 출판, 서로의 고통을 기록하고 증언하려 했던 언어의 시도들이 이 책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휴머니즘은 완성된 교리가 아니라, 실수하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더 나은 선택을 향해 방향을 다시 잡으려는 인간의 끈기를 가리킨다.

이 책의 중요한 지점은 휴머니즘을 서구 남성 엘리트의 전유물로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베이크월은 르네상스 시대의 여성 학자 카산드라 페델레, 여성의 몸과 자유를 새로 정의한 어밀리아 블루머,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고발한 프레더릭 더글러스, 흑인 여성의 삶을 기록한 조라 닐 허스턴 등의 사례를 전면에 불러낸다. 지적 전통의 주변부에 밀려났던 존재들을 다시 중심으로 초대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휴머니즘의 원칙을 실제 인물들의 얼굴과 목소리로 보여 준다.

오늘 우리는 SNS 알고리즘이 분노를 증폭시키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는 시간을 살고 있다. 저자는 이런 시대일수록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을 포기할 수 없고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더 절실해졌다고 말한다. 읽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서로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오래된 습관이야말로 기술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며,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행복할 때는 지금, 행복할 곳은 여기”라는 메시지는 추상적인 위로가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겠다는 작은 결심으로 읽힌다.

이 책은 인간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며, 고립과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데 필요한 가장 고전적인 용기, 곧 인간을 믿는 용기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건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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