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상세

newbooks

천 년의 러시아 리얼리즘, 캔버스 위에 되살아나다,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 출간(김희은, 자유문고)

풍속화에서 추상까지 러시아 미술의 속살을 읽다

장세환2025년 12월 4일 오후 1:34
1,192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jpg출판사 제공

러시아라고 하면 거친 정치와 전쟁의 뉴스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천 년에 걸쳐 축적된 풍부한 회화의 세계가 있다. 자유문고에서 출간된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는 그 거대한 역사 가운데 특히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에 초점을 맞춰, 그림으로 쓴 러시아 근현대사를 풀어낸다. 러시아 그림 전문 갤러리 까르찌나를 운영하며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푸시킨 박물관 도슨트로 활동해 온 김희은 저자가, 현장에서 쌓은 해설과 시선을 그대로 책으로 옮겼다.

책의 첫 장은 러시아 풍속화에서 출발한다. 영웅 서사와 황제의 초상만을 다루던 아카데믹한 회화에서 벗어나, 농민과 서민의 일상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림들이 러시아 리얼리즘의 문을 연다. 베네치아노프가 천대받던 농민의 손과 얼굴을 존엄한 주인공으로 끌어올리고, 페로프가 장례식 행렬과 아이들의 눈빛 속에 가난과 불의를 고발하던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풍자적 풍속화와 비판적 리얼리즘 풍속화의 계보를 짚으며, 러시아 회화에 스민 유머와 냉혹한 현실 인식이 어떻게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지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의 무대는 이동파다. 이반 크람스코이를 중심으로 모인 화가들이 수도의 미술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와 지방 도시를 돌며 전시를 연 사건은, 러시아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귀족의 응접실이 아닌 농촌 마을과 지방 도시의 전시장에서 민중과 눈을 맞추며, 그림의 주제와 감상자를 동시에 바꾸어 놓았다. 책은 크람스코이의 뚜렷한 눈빛을 담은 초상들, 니콜라이 게의 종교화를 빌린 양심의 질문, 마코프스키와 야로센코가 그려 낸 거리와 가로수 길의 사람들을 통해, 이동파의 문제의식이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얼굴과 몸짓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짚어 나간다.

러시아 리얼리즘이 꽃을 피운 배경에는 파벨 트레챠코프라는 후원자의 결단이 있다. 저자는 러시아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불리는 그의 삶과 수집을 따라가며,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러시아 역사와 미술의 거대한 보고로 소개한다. 스트렐치 처형을 그린 수리코프의 역사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베레샤긴의 연작, 푸시킨과 체홉, 러시아 여인들을 담은 초상화까지, 한 부호의 사적 수집이 어떻게 한 나라의 시각적 기억이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책의 중심에는 일리야 레핀이 있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에서 노동자의 굽은 어깨와 피로한 눈동자를, 소피아 공주와 이반 뇌제의 비극적 순간에서 권력의 광기와 죄책감을, 혁명기 작품들에서 시대의 균열과 불안을 포착한 레핀의 시선이 자세히 다뤄진다. 저자는 레핀이 역사화가이자 초상화가이며 혁명화가였던 이유를, 작품 하나하나에 얽힌 시대적 맥락과 화면 구성, 인물의 심리 묘사를 통해 차근차근 안내한다.

후반부에서는 러시아 무드 풍경화와 함께, 러시아 미술사의 방향을 바꾼 세 점의 그림을 집중 조명한다. 사브라소프와 쉬시킨, 레비탄이 그려 낸 숲과 강, 안개와 눈발 속 자연은 거대한 러시아 대지와 인간의 정서를 함께 담아낸다. 마지막 장에서 다루는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그리스도 그림, 브루벨의 악마,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리얼리즘에서 상징주의와 추상으로 이어지는 전환의 갈림길을 보여준다. 신앙과 회의, 현실 도피와 직시, 재현과 순수 형태의 긴장이 이 세 그림에 어떻게 축약되어 있는지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는 러시아라는 낯선 나라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길로, 그림을 통해 시대와 사람, 이념과 상처를 함께 읽어 보고 싶은 독자에게 깊고 단단한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관련 기사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6월 10일 오후 3:56
8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6월 10일 오후 3:52
11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6월 10일 오후 3:45
8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