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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강제노동의 기억을 평화의 미래로 바꾸다, 『긴 잠에서 깨다』 출간(정병호, 푸른숲)
홋카이도 유골발굴로 평화를 모색한 정병호의 마지막 기록
출판사 제공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으로 생을 마감하고 이름 없이 땅속에 파묻힌 조선인들의 유골이 어떻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를 추적한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현장 인류학을 실천해 온 고 정병호의 구술을 정리한 『긴 잠에서 깨다』가 푸른숲에서 출간됐다. 저자는 30여 년 동안 홋카이도 강제노동 현장을 오가며 유골발굴과 유족 찾기, 귀향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시민들이 함께 평화를 배우는 장을 만들고자 했다. 이 책은 그 여정을 치열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되짚으며, 과거사 청산을 넘어 ‘함께 살아갈 내일’을 묻는다.
정병호는 문화인류학자로서 연구실을 넘어 현장으로 뛰어든 실천 지식인이었다. 일본 현장 연구 중 우연히 만난 스님과의 인연으로, 그는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댐 공사 현장에 묻힌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이름과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채 방치된 묘역은 그에게 “인류학자라면 이 일을 외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는 학생들과 동료 연구자들을 모아 유골발굴을 체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을 세운다. 책의 앞부분은 이 운명적인 만남과 준비 과정, 그리고 한 개인의 결심이 어떻게 국제적 연대로 확장되는지를 생생한 구술로 들려준다.
1997년 시작된 유골발굴 현장은 곧 국적을 넘어선 청년들의 만남의 장이 된다.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 대만 등 동아시아 곳곳에서 3천 명에 이르는 참가자가 ‘동아시아공동워크숍’에 합류해 여름마다 슈마리나이 숲으로 모였다. 낮에는 조릿대 숲을 헤치고 유골을 발굴하고, 밤에는 역사와 차별, 화해를 주제로 토론을 이어가는 장면들이 책 속에 촘촘히 기록돼 있다. “가해와 피해”라는 단순한 구도에서 벗어나 서로를 한 사람의 이웃으로 마주하기까지, 문화적 편견을 넘어가는 과정의 갈등과 오해, 그리고 다시 연결되는 순간을 저자는 숨김없이 전한다.
책의 중심 축 가운데 하나는 ‘70년만의 귀향’으로 불린 유골 송환 프로젝트다. 저자는 일본 각지에 분산 보관돼 있던 유골 115구를 모아 도쿄, 교토, 히로시마를 거쳐 부산항으로 모셔오는 여정을 동행한다. 불교와 개신교, 가톨릭, 천도교가 함께하는 다종교 추도 의례,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마련한 묘역, 이후 ‘평화디딤돌’과 강제노동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어떻게 현재의 교육과 도시 공간, 시민운동으로 번져가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유골발굴은 더 이상 숫자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죽은 이를 사람으로 돌려놓는 일”이자 살아 있는 이들의 감각을 바꾸는 작업으로 새롭게 의미를 얻는다.
책은 총 9장으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과 귀향 과정뿐 아니라, 차별 구조를 바라보는 인류학자의 시선, 남북 어린이와 이주 배경 청소년을 위한 교육 운동, 평화디딤돌 프로젝트 등 저자의 삶 전반을 아우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록에서는 어린 시절 유신 체제와 야학 경험, 미국 유학과 일본 연구가 어떻게 하나의 실천 인류학으로 이어졌는지, 또 그 실천이 동료와 제자들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는지 정리한다. 곳곳에 실린 동료 연구자와 해외 학자의 추천글은 정병호라는 한 연구자가 동아시아 기억 공동체 형성에 남긴 발자취를 국제적 맥락에서 조명한다.
『긴 잠에서 깨다』는 한국사와 일제강점기, 한일 관계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는 물론, 평화교육과 시민운동, 인권 현장을 고민하는 교사와 활동가들에게도 유용한 길잡이가 된다. 강제동원 문제를 감정의 대립으로만 보지 않고, 구체적인 사람과 장소, 제도와 실천의 언어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 기록은 “과거를 덮고 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함께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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