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소설가 이선진의 첫 장편소설 『잃기일지』가 은행나무 시리즈 N°24로 출간됐다. 2020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그는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 이후, 이번 작품에서 상실과 침묵, 자기 호명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주인공 진진주는 어린 시절 상처와 결핍 속에서 ‘나’라는 1인칭을 지우고, 고유명사 ‘진진주’라는 부캐 뒤로 숨어 살아간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제3자로 타자화하는 방식은 자신을 지켜내려는 방어기제였다. 그러나 다섯 살 조카 이석기의 예측 불가능한 질문과 행동은 진주의 성벽에 균열을 낸다. 석기는 유년의 알레고리로 작동하며, 진주가 외면해온 어린 시절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소설은 “여러 개의 목소리를 쓰고 벗으며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는 박연준 시인의 말처럼, 목소리로 이루어진 변검술이다. 진주는 “나는 마음이 아프다” 대신 “진진주는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석기와의 관계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순 없어!”라고 스스로를 호명한다. 이는 침묵을 깨고 주어의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작품은 상실을 치유나 결손의 메움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실을 적극적으로 겪어내려는 애도의 과정을 통해, 침묵 속에 유폐되었던 유년의 자아를 현재의 주체 안으로 편입시킨다. “마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같았다. 내리고 흩날리고 녹고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눈 같은 것이었다”라는 구절은, 마음의 변화를 동사적 운동으로 포착하며 상실의 시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잃기일지』는 언어의 형식과 균열을 서사의 뼈대로 삼는다. 반복되는 “내 사전에 ~은 없다”라는 문장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지켜내려는 선언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가 두 겹으로 포개지는 시간의 구조는, 상실을 단선적 치유가 아닌 지속적 공명으로 보여준다.
이선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잃어버린 것을 더 잘 잃어버리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응답한다. 『잃기일지』는 상실과 애도의 서사 속에서 자기 호명의 순간을 포착하며, 동시대 한국소설의 중요한 목소리로 자리매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