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필리핀의 좁은 골목에서 자라는 아이들, 그들의 얼굴에는 한국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은 보호와 책임이 아니라 상처와 결핍으로 이어졌다. 『코피노, 남겨진 아이들』은 이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수년간 필리핀 현장에서 코피노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만나며, 한국인 아버지의 책임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구조적 모순을 생생히 담아냈다.
많은 한국 남성들이 필리핀에서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남긴 뒤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있었지만, 어머니들은 그곳에 남아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돈의 무게는 달랐다. 한국에서 대수롭지 않게 쓰는 돈이 필리핀에서는 며칠 치 생활비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책임은 국경을 넘어 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강조한다. 양육비는 선의가 아니라 의무이며, 후원금으로 대체될 수 없는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점을.
책은 단순히 개인의 사연을 나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신분 문제로 사회에서 배제되며, 빈곤 속에서 마약 심부름이나 부랑아로 내몰리는 현실을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들은 소송을 시작할 돈조차 없어 절차를 밟지 못했고, 판결문이 나와도 실제로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책임을 묻는 길은 종이 위에서는 한 걸음 나아갔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벽 앞에 서 있었다.
책 속에는 다양한 어머니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가족을 놓지 못하는 사람, 화려함을 놓지 못한 사람, 다른 방식으로 남겨진 사람. 그러나 공통된 사실은 하나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선택은 아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상처와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고 자라야 했다.
『코피노, 남겨진 아이들』은 단순히 동정심을 자극하는 책이 아니다. “아이의 눈물”을 팔지 않고, “어른의 책임”을 묻는다. 한국 사회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제도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아이와 어머니를 찾고, 한국인 아버지를 추적하며, 양육비와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선의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독자에게 묻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해야 했던 이 책임의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한 무거운 물음표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