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상처는 얼마나 오랫동안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상처를 넘어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일은 가능할까. 박선형 작가의 장편소설 『떠난 것들의 초상』은 폭력과 상처, 자기부정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회복해 가는 한 인간의 긴 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청어소설선 18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떠난 것들의 초상』은 단순한 성장 소설이나 가족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어린 시절 경험한 학대와 상처로 인해 삶의 방향을 잃은 한 인물이 자신을 둘러싼 기억과 마주하며 치유와 성장에 이르는 과정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소설은 강렬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날 내가 자른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이 문장은 주인공이 오랫동안 품어온 상실과 억압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시절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이었다. 작품 속 다용도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과 학대가 응축된 상징적 장소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그 속에서 절망과 불안을 견디며 성장했고, 세상과 자신을 온전히 믿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떠난 것들의 초상』은 상처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더욱 주목한다. 군대와 가족, 사랑과 이별, 그리고 먼 타국의 시간들은 모두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기능한다. 삶의 여러 경험들은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인공은 오랫동안 세상과 타인을 바꾸려 노력한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소설은 결국 가장 어려운 변화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작품의 핵심 메시지인 “바꿔야 할 것은 오직 내 마음 하나였다”는 깨달음은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 작품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작가 박선형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저자는 육군 대위 출신으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바바라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의 주요 국립연구소에서 핵전략을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다. 치열한 군 생활과 학문적 여정을 거친 저자는 현재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성장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특히 프롤로그에 담긴 작가의 고백은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그는 이 소설을 “폭력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과 자신을 기만했던 날들에 대한 수치스러운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세상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더 이상 거짓된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기에 이 이야기를 써야 했다고 밝힌다.
그래서 『떠난 것들의 초상』은 허구의 소설인 동시에 매우 진실한 고백처럼 읽힌다. 독자는 작품 속 인물의 상처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상처와도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 관계 속의 아픔,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작가는 성장에 대한 독특한 시선도 제시한다. 그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성장보다 노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지만, 영혼의 성장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존재이며, 삶의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철학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떠난 것들의 초상』은 떠난 사람들을 붙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떠난 것들의 흔적을 통해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다.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며,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포함한 자신 전체를 받아들이는 여정이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와 후회, 떠나보낸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박선형 작가는 그 기억들 앞에 멈춰 서서 묻는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를 용서했는가.
『떠난 것들의 초상』은 상실과 회복, 자기 발견과 성장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떠난 것들을 추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기억들을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공감을 건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