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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열차 위에서 만난 서울의 첫 얼굴, 『서울과의 만남』 출간(강인숙, 열림원)
강인숙 저자가 1945년 남하 이후 1952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비상시의 소녀 시절을 회고한다.

출판사 제공
한 도시와의 만남이 검은 매연과 소독약 냄새로 시작될 수도 있다. 문학평론가 강인숙의 『서울과의 만남』은 1945년 11월 피란 열차를 타던 때부터 1952년 3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기까지를 담은 회고록이다. 열림원이 펴낸 이 책은 유년 회고록 『성안집 사람들』 이후의 시간을 이어 받아, 대한민국이 가장 뜨겁고 혹독한 과도기를 지나던 순간을 한 소녀의 기억으로 복원한다.
저자는 자신이 나면서부터 마주해야 했던 시대를 ‘비상시’의 연속으로 기억한다. 1933년생인 그는 초등학생 시절 2차 대전을 겪으며 솔뿌리를 캐는 근로 동원에 시달렸고, 해방 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려 하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남하했다. 열두 살 소녀가 밤중에 38선인 한탄강 철교 침목 사이를 뱀처럼 기어서 건너는 장면은 이 책의 가장 강렬한 출발점 중 하나다.
1부 ‘기차 지붕에 타다’는 남하의 공포와 생존의 시간을 다룬다. ‘포도 무늬 누비이불’, ‘한탄강 철교를 기어서 넘는다’, ‘미군과 DDT’, ‘비상시의 풍속도’ 같은 제목들은 피란의 역사가 거대한 정치 사건만이 아니라 몸의 기억과 사물의 감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울과의 첫 만남은 환희보다 혹독함에 가까웠다. 검은 매연을 뒤집어쓰고 미군의 DDT 소독약 세례를 받으며 입성한 도시는 낯설고 차가웠다.
2부 ‘서울과의 만남’과 3부 ‘멀고 먼 학교’는 난민의 삶과 서울 문화의 충격을 함께 그린다. 빈손으로 월남한 가족은 변두리 적산가옥에서 지독한 추위와 남동생의 죽음을 겪는다. 동시에 저자는 서울의 중심이자 서울다움이 응축된 경기여고에 진학한다. 함경도 북방 문화권에서 자란 소녀에게 사대문 안 서울 토박이들의 어법과 예절, 조숙한 삶의 철학은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였다.
학교의 기억도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대낮의 도심에서 정객들이 암살당하고 학교에 좌우익 테러대가 드나들던 시국 속에서도, 마분지 교과서로 우리 문학을 배우며 눈물짓던 환희가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우리 문학’, ‘서점 없는 시대의 책 읽기’, ‘뿌리 다시 내리기’는 결핍투성이 시대에도 지식과 문학을 향한 갈망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지탱했는지 보여준다.
강인숙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고, 건국대학교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으로 있으며, 『성안집 사람들』, 『글로 지은 집』, 『나는 글과 오래 논다』 등 자전적 에세이를 써 왔다. 『서울과의 만남』은 개인의 회고를 넘어, 비상시를 건너온 세대가 문학과 배움으로 자신을 지켜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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