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상세

newbooks

“전쟁은 인간 안에 숨어 있다”, 『학살기관』 출간(이토 케이카쿠, 문학수첩)

유전자와 언어, 전쟁과 인간 본성을 해부한 일본 SF 걸작 재출간

장세환2026년 5월 27일 오후 1:28
121

학살기관.jpg출판사 제공

핵폭탄 테러 이후의 세계.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감시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본 SF 문학의 전설로 남은 이토 케이카쿠의 대표작 『학살기관』이 문학수첩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학살기관』은 박찬욱 감독이 주목한 작품으로도 알려진 소설이다. ‘철학 SF’와 ‘밀리터리 SF’를 결합한 이 작품은 전쟁과 언어, 감시와 폭력, 인간의 생존 본능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현대 문명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소설의 배경은 핵 테러 이후의 근미래다. 선진국들은 생체 인증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며 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반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학살과 내전이 연쇄적으로 벌어진다. 미국 특수정보부대 소속 클라비스 셰퍼드 대위는 이 참극들의 배후에 ‘존 폴’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적하게 된다. 그리고 수사 끝에 도달한 것은 인간 내부에 숨겨진 폭력의 구조다.

작품은 단순한 디스토피아 액션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 사고와 언어, 폭력의 관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책 속에서 존 폴은 이렇게 말한다. “지옥은 여기 있어요. 머릿속, 뇌 안에.” 인간이 만들어낸 전쟁과 학살의 본질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또 다른 문장은 작품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쟁이 단순히 일일 뿐이라는 것. 예측도 통제도 가능한 ‘작업’이라는 것.” 전쟁조차 시스템과 업무로 환원되는 시대, 인간의 윤리와 감각은 어떻게 무뎌지는가를 소설은 냉혹하게 보여준다.

이토 케이카쿠는 언어 자체를 ‘기관’으로 바라보며 인간 진화와 폭력의 관계를 상상한다. “언어가 진화의 적응에 의해 발생한 기관에 불과하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기관에 의해 사라진 생물도 있지 않은가. 긴 이빨 때문에 사라진 검치호 같은.” 이 문장은 인간 문명이 스스로 만든 언어와 시스템에 의해 붕괴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남긴다.

작품은 정보사회와 감시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도 담고 있다. “사람들은 부드바이젤이 안전하게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두지만, 자신들의 생활을 지탱하는 기계가 얼마나 비참한 장소에서 생산되는지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대사는 오늘날 글로벌 공급망과 소비 윤리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1974년생인 이토 케이카쿠는 『학살기관』으로 일본 SF계를 뒤흔든 뒤 『하모니』 등을 발표하며 강렬한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지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짧은 생애는 오히려 작품 세계를 더욱 전설처럼 남겼다. 『학살기관』은 일본 ‘베스트 SF 2007’ 1위에 오르며 현대 일본 SF의 기준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는 “세 번 다시 태어나도 이런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극찬했고, 게임 디자이너 고지마 히데오는 “지금이야말로 이야기의 힘을 깨닫게 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424쪽 분량의 『학살기관』은 액션과 철학, 정치와 심리, 미래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한꺼번에 품은 작품이다. 감시와 혐오, 전쟁과 정보가 일상이 된 시대에 다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련 기사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6월 10일 오후 3:56
9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6월 10일 오후 3:52
12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6월 10일 오후 3:45
8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