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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침묵 이후, 붉은 화성을 건너는 소녀의 기록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 (네이선 밸링루드, 문학수첩)

무너진 세계에서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인간성의 여정

최준혁2026년 5월 7일 오전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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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파랑의 궤도.jpg출판사 제공

세상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버틸까.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과거를 버리고, 또 누군가는 사라져가는 목소리 하나를 끝까지 붙든다.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는 그 마지막 흔적을 놓지 않으려는 소녀의 이야기다.

문학수첩에서 출간된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는 네이선 밸링루드의 장편소설이다. 작품은 1930년대 분위기의 가상 화성 개척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구와의 모든 연락이 끊긴 ‘침묵’ 이후의 시대, 열네 살 소녀 애너벨 크리스프는 화성의 작은 식당에서 주방 엔진 ‘왓슨’과 함께 살아간다.

애너벨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은 지구로 떠난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낡은 실린더다. 그러나 무법자들이 식당을 습격해 그것을 빼앗아 가면서 이야기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애너벨은 왓슨과 함께 실린더를 되찾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붉은 사막과 폐허가 된 개척지, 기이한 광물 ‘스트레인지’에 잠식된 세계를 통과하게 된다.

소설은 단순한 추적극으로 흐르지 않는다. 황량한 화성 풍경 위에 스페이스 웨스턴의 질감과 고전 과학소설의 낭만을 겹쳐 놓는다. 거대한 전쟁 엔진과 유령, 광기에 잠식된 광부들이 등장하지만 중심에는 끝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존재들의 선택이 놓여 있다.

특히 애너벨 곁을 지키는 낡은 주방 엔진 왓슨은 작품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만든다. 인간들은 생존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타협하지만, 오히려 기계인 왓슨만이 오래된 규칙과 다정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폐허가 된 세계 속에서 인간성과 윤리를 가장 끝까지 붙드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도 이 작품이 남기는 묘한 긴장이다.

네이선 밸링루드는 장르문학계에서 두 차례 셜리 잭슨상을 수상한 작가다. 이번 작품은 레이 브래드버리와 아이작 아시모프로 이어지는 고전 과학소설의 계보 위에 황량한 감성과 성장 서사를 덧입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외에서는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 “스페이스 웨스턴에 보내는 연서”라는 반응도 이어졌다.

붉은 먼지와 푸른 안개 사이를 지나며 애너벨이 끝내 붙들고 있는 것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다. 사라진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고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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