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상세

newbooks

땅의 시간으로 다시 살아가는 법, 『우리들의 농경 사회』 신간 (이소정·민음사)

절기와 노동 속에서 회복과 생존의 감각을 묻는 장편소설

최준혁2026년 4월 30일 오전 11:51
202

우리들의 농경사회.jpg출판사 제공

『우리들의 농경 사회』는 탈출로부터 시작되는 소설이다. 제3회 〈연세-박은관문학상〉을 수상한 이소정의 이 장편은, 어둡고 폐쇄적인 세계를 벗어나 땅의 시간 속으로 들어서는 세 인물의 서사를 통해 오늘의 삶과 미래의 생존을 함께 묻는다.

선지와 문복, 그리고 ‘나’는 갈 곳이 없었던 아이들이다. 이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흘러든 기도원에서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를 섬기며 자랐다. 기도원에서의 시간은 낮과 밤의 구분조차 흐릿한 폐쇄의 연속이었다. 기도와 울음, 처벌과 복종 속에서 세 사람은 몸만 자란 어른아이로 남았다. 소설은 이들이 다마스를 타고 어느 산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유산처럼 믿고 있는 땅을 찾아서다.

이 도주에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실려 있다. 그들의 친구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한 남자가 결박된 채 다마스 짐칸에 실려 있다. 『우리들의 농경 사회』는 이처럼 폭력과 공포, 추적의 기운을 품은 상태로 문을 연다. 그러나 이 소설이 향하는 방향은 복수나 단죄가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쪽이다.

도착한 산에는 구원 대신 맹지가 있다. 황토 집 한 채와 버려진 땅이 전부다. 선지와 문복, 그리고 ‘나’는 마른 멸치로 연명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던 중 등장하는 인물이 구순태다. 그는 일을 하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말하며, 세 사람을 농사의 세계로 이끈다. 이때부터 소설의 시간은 땅의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서사의 구조가 절기에 맞춰 짜여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장은 소한, 우수, 경칩, 청명, 입하 등으로 이어진다. 냉이가 죽고 보리가 익는 입하에는 감자를 심고, 망종에는 사슴뿔이 떨어지며, 한로에는 참깨를 털고 들깨를 짜서 들기름을 얻는다. 인물들은 쫓기듯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반복 속에서 살아간다.

농사는 이들에게 이상향이나 낭만이 아니다. 잡초는 매일 자라고, 몸은 늘 피로하다. 그러나 땅의 시간은 정직하다.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다시 때가 오면 뿌린 만큼 거둔다. 이 정직한 반복 속에서 인물들의 내면에도 변화가 생긴다. 잡초를 뽑다 말고 “그냥 둬라”라는 문복의 말은, 땅에서 얻은 체념이자 깨달음처럼 울린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물러서는 법을 세 사람은 조금씩 배운다.

『우리들의 농경 사회』는 농경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기도원에서의 삶이 결과만을 강요하고 과정을 지워 버린 세계였다면, 농사의 세계는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겪는 과정을 되돌려준다. “싸워서 진 자는 침묵하고, 이긴 자는 나무를 심는다”라는 구순태의 말은 이 소설이 제시하는 윤리의 핵심이다.

이 작품에서 농경 사회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작가는 농사를 가장 오래된 기술이자, 가장 미래적인 질문의 방식으로 제시한다. 물류창고와 새벽 배송,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욕망의 물결과 대비되는 이 세계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드러내는 거울로 작동한다.

이소정의 문장은 땅의 속도를 닮아 있다. 빠르지 않고, 과장되지 않으며, 계절의 변화처럼 조용히 누적된다. 폭력의 기억과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땅 위에서의 노동은 인물들이 다시 자신을 길러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우리들의 농경 사회』가 탐색하는 구원은 거창하지 않다. 믿음은 자주 배신당하고,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해마다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는 마음이 이 소설의 중심에 놓인다. 문학평론가 이소가 말했듯, “믿을 수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로 한 것을 믿는 마음”이 이 작품을 떠받친다.

이 소설은 치유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손으로 만지는 삶, 땀이 흐르고 절기와 호흡하는 시간을 통해 회복이 가능한 조건을 제시한다. 『우리들의 농경 사회』는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혼란스러운 시대에,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의 속도로 쓰인 하나의 이정표 같은 작품이다.

관련 기사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글로벌 사우스의 중심, 『인도에서 기회를 만나다』 출간 (신시열, 이콘)

6월 10일 오후 3:56
9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몸은 스스로 치유한다, 『자가 수리점』 출간 (헨리 비일러, 사이몬북스)

6월 10일 오후 3:52
12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사라지는 손목, 남는 체온 ― 『솜사탕 증후군』 (박윤일, 파란)

6월 10일 오후 3:45
8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