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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먼저 작동하는 소통의 구조, 『말하지 않고 말하기』 신간 (김정운·arte)
AI 시대에 다시 묻는 상호주관성, 인간 소통의 가장 오래된 조건들
출판사 제공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말이 늘어날수록 소통은 더 어려워졌다고 느낀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신간 『말하지 않고 말하기』는 이 역설에서 출발해, 소통을 ‘말 잘하는 기술’이 아닌 인간 존재의 기초 조건으로 다시 정의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통의 본질을 메시지 전달이나 설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여섯 가지 조건—터치, 눈맞춤, 정서 조율, 순서 바꾸기, 함께 보기, 관점 바꾸기—를 제시하며, 언어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던 상호작용의 구조를 추적한다. 이는 아기와 양육자 사이의 초기 경험에서 시작해, 언어 습득과 자아 형성, 나아가 민주주의와 문명의 조건으로까지 확장된다.
김정운은 비고츠키, 대니얼 스턴, 토마셀로, 하비 색스 등 발달심리학·문화심리학·사회학 연구를 교차시켜 인간 소통의 전체 지도를 그린다. 말하기 이전에 피부로 느끼는 터치, 존재를 승인하는 눈맞춤, 감정의 리듬을 맞추는 정서 조율은 소통의 부가 요소가 아니라 핵심이다. 언어는 이 토대 위에서 후행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주장이다.
책은 이론 설명에 머물지 않는다. 오바마의 ‘6초간 침묵’이 왜 강력한 연설이 되었는지, 원숭이 실험이 보여준 정서적 유대의 의미, 디지털 공간에서 분노와 질투가 쉽게 증폭되는 이유가 일상의 사례와 함께 분석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 소통 실패의 원인이 정보 부족이나 표현력 결핍이 아니라, 상호주관적 맥락의 붕괴에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AI 시대를 다루는 시선이 두드러진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정교하게 모방할 수 있을수록, 인간만이 가능한 소통의 영역은 더욱 분명해진다. 저자에 따르면 기계는 말을 생성할 수 있지만, ‘함께 보고’, ‘차례를 기다리고’, ‘감정의 강도를 조율하는’ 상호주관적 경험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유창한 말이 아니라, 감탄과 존중으로 매개되는 인정의 감각이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는 소통을 기술이나 전략이 아니라 관계를 성립시키는 조건으로 바라보게 한다. 말이 넘치는 시대에 말 이전의 감각과 리듬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은, 인간이 왜 소통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그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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