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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자리에서 되살아나는 5월의 시간…『그들이 있었던 곳』 출간 (정찬·말하는나무)
1980년 광주, ‘사건’이 아닌 ‘존재’의 기록으로 다시 쓰는 장편소설
출판사 제공
정찬의 장편소설 『그들이 있었던 곳』은 1980년 5월 광주를 다시 불러오지만, 그 방식은 재현이나 고발에 머물지 않는다. 이 소설이 붙잡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시간에 “누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장소는 광주이지만, 이 작품이 끝까지 파헤치는 것은 공간보다 존재의 밀도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 기록으로 환원되지 못한 선택들이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소설은 계엄군과 시민군, 노동자와 성직자, 가해와 방관의 경계에 놓인 인물들을 교차시키며 전개된다. 그러나 이들은 유형화된 인물이 아니다. 저자는 누구도 쉽게 영웅이나 악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은 두려움과 죄책감, 신념과 망설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누군가는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채 시간을 잃는다. 이 흔들림이야말로 『그들이 있었던 곳』이 그리고자 하는 광주의 실체다.
정찬은 이 작품에서 광주를 ‘전쟁의 현장’이 아니라 ‘윤리의 극한’으로 배치한다. 무정부 상태에서도 비정치적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서술, 총을 들었으되 승리를 믿지 않았다는 시민군의 인식은 폭력의 논리를 단순화하는 서사를 거부한다. 총을 드는 행위는 파괴가 아니라 동행의 선택이었고, 죽음은 승리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불꽃으로 묘사된다. 소설은 반복해서 묻는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어디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이 작품의 문장은 유난히 감각적이다. 비에 젖은 도시의 저녁 풍경, 피로 덧칠된 거리의 정적, 총성이 멎은 뒤 찾아오는 어색한 고요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체험하게 만든다. 이 밀도 높은 묘사는 광주를 추상적 역사 대신 감각의 기억으로 되돌려 놓는다. 독자는 사건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 곁에 ‘머무르게’ 된다.
『그들이 있었던 곳』이 특별한 지점은 가해의 얼굴 또한 단일하게 그리지 않는 데 있다. 계엄군 병사의 내면, 국가 폭력의 하수인이라는 자각 속에서 붕괴되는 영혼은 이 소설이 피하지 않는 불편한 영역이다. 이는 책임을 흐리는 시도가 아니라, 폭력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선택에 가깝다. 정찬은 선과 악의 대립보다, 그 경계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작가의 말에서 정찬은 이 소설이 2024년 12월의 장면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비상계엄을 막기 위해 국회로 달려가던 시민들의 모습은 그에게 1980년 5월의 광주를 소환했다. 그 연결의 핵심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대신 역사가 반복해서 현재로 흘러드는 방식을 조용히 드러낸다. 광주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매번 다른 얼굴로 다시 호출되는 질문이라는 인식이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이 소설은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면할 수도 없게 만든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광주를 말하면서도, 끝내 광주만을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침묵과 동행 사이에서 어떤 자리에 설 것인가를 독자 각자에게 되묻는다.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큰 흔적은 서사의 결말이 아니라, 읽는 이에게 지워지지 않고 남는 자리 그 자체다. 정찬은 그 자리를 ‘그들이 있었던 곳’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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