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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떻게 서로를 깨운 뒤 다시 흩어지는가,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올가 토카르추크, 은행나무)

조각난 서사를 별자리처럼 엮으며 존재와 세계의 리듬을 탐색한 단편집

장세환2026년 4월 28일 오후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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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jpg출판사 제공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는 올가 토카르추크 문학의 출발점이자 집약체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열아홉 편의 이야기는 하나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다. 대신 각각의 이야기들은 느슨하게 공명하며, 독자로 하여금 조각과 조각 사이의 관계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이끈다. 토카르추크가 이후 장편들에서 본격적으로 확장해 나갈 ‘별자리 소설’ 형식의 원형이 바로 이 책에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는 완결된 세계가 아니다. 단편 하나하나는 독립된 서사이지만, 그 내부에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통로들이 숨겨져 있다. 독자는 순서대로 읽어도, 건너뛰어 읽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감각하는 일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에서 북소리는 단일하지 않다. 여러 개의 북이 각기 다른 박동으로 울리며 하나의 밤을 지탱한다.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 역사와 개인의 기억, 철학적 사유와 일상의 장면을 자유롭게 오간다. 「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에서는 독서 행위 자체가 존재론적 계약처럼 제시되고, 「스코틀랜드에서 보낸 한 달」에서는 문학이 ‘칭송받는 거짓말’이라는 선언을 통해 진실의 경계를 흔든다. 이때 거짓말은 기만이 아니라, 현실을 수정하고 다른 가능성을 실험하는 윤리적 상상력이다.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은 “이야기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섬」과 「바르도의 성탄 구유」 같은 작품에서 이야기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사건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호출한다.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기적 앞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사물들과 관계들이다. 토카르추크는 이 미세한 주변을 통해 세계의 윤곽을 다시 그린다.

이 단편집의 서사적 특징은 화자의 불안정성이다. 화자는 자주 바뀌고, 때로는 독자와 뒤섞인다. 독자가 이야기를 읽는 동안, 소설 속 인물은 독자의 일상으로 스며들고, 독자는 소설의 세계 안으로 잠입한다. 김혜순의 추천사처럼, 이 소설들은 독자의 존재론이 시험되는 장소다. 소설은 읽히는 대상이 아니라, 독자를 재배치하는 장치가 된다.

토카르추크의 문장은 질주하지 않는다. 문장들은 선로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며, 독자가 멈춰 서서 사유할 시간을 확보한다. 때로는 상식의 경계를 넘어 초현실적 터널로 진입하지만, 그 이행은 언제나 조용하고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환상은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표제작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에서 북소리는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는 마지막 리듬으로 등장한다. 누군가는 파수꾼처럼 남아 북소리가 끊기지 않도록 지킨다. 이 장면은 토카르추크 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로 읽힌다. 이야기는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박동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도시가 그 공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야기는 계속 울린다.

이 책은 토카르추크 문학을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는 하나의 지도 역할을 한다. 이후 발표될 『방랑자들』, 『태고의 시간들』, 『야고보서』 등에서 확장되는 주제와 형식, 세계관의 씨앗들이 이 단편집 곳곳에 흩어져 있다. 동시에 기존 독자에게는 작가의 상상력이 형성되는 순간을 되짚는 귀중한 기록이다.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는 단편집이면서도 완결을 거부한다. 이야기는 끝나지만, 리듬은 남는다.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어느 장면에서 울렸던 북소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 잔향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이 단편집에서 토카르추크는 말한다. 이야기는 하나의 진실을 전달하지 않는다고. 대신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울리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교란하고 확장한다고.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는 바로 그 교란과 확장의 실험을 가장 밀도 높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하나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경험에 가깝다. 그리고 그 리듬이 끝난 뒤, 독자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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