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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글자는 보통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한자, 문명의 무늬』는 뜻보다 먼저 모양을 바라본다. 갑골문과 금문에서 출발해 해서와 초서, 전각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한자가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따라간다. 읽는 책이라기보다, 오래 들여다보는 책에 가깝다.
윤성훈은 한자의 형·음·의 가운데 ‘형’에 집중한다. 글자가 소리를 얻기 전, 의미를 정착시키기 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먼저 존재했다는 사실을 책의 중심에 둔다. ‘봄 춘(春)’ 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갑골문, 금문, 음가, 의미를 길게 우회하는 대목에서, 저자의 관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한자는 기호이기 전에 시각적 산물이었다.
책의 시선은 고문자학과 서예사를 가로지른다. 문자 성립기의 불안정한 형태부터, 한나라 예서의 정착, 당나라 해서의 표준화, 그 이후 개인적 창조로 향하는 흐름까지를 끊지 않고 이어간다. 왕희지와 안진경, 소동파, 등석여 같은 이름들이 등장하지만, 인물 평전처럼 다뤄지지 않는다. 각 시대의 글씨는 언제나 그 시대의 사유 방식과 함께 놓인다.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표준’에 대한 설명이다. 개성은 무질서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 비개성이 먼저 자리를 잡은 뒤에야 비로소 개성이 출현할 수 있다는 논리는 서예사를 넘어 문화 전반으로 확장된다. 안진경의 강렬한 글씨가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형식과 자유의 관계가 선명해진다.
이 책은 친절한 입문서와는 거리가 있다. 분량도, 밀도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저자는 한자를 쉽게 만들기 위해 설명을 줄이지 않는다. 어려운 개념은 건너뛰지 않고, 대신 충분한 맥락 속에 놓는다. 고문자학의 엄밀함과 서예 감상의 감각이 같이 가는 이유다.
『한자, 문명의 무늬』는 한자를 배운 사람보다, 한자를 오래 써온 사람에게 더 말을 거는 책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획의 방향, 굽음, 리듬을 다시 보게 만든다. 글자를 읽던 눈이, 어느 순간 문명의 표면을 훑고 있다는 감각도 따라온다.
이 책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한자의 ‘완성’이 아니라 ‘지속’이다. 표준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변화, 전통을 곱씹어 다시 만든 획, 작은 인면 안에 들어온 오래된 시간들. 한자는 죽은 문자가 아니라, 계속 쓰이며 변해온 형상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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