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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흩어져도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 신간 (다샤 키퍼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알츠하이머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헤매는 ‘기억의 미로’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낸 따뜻한 심리 탐구서

장세환2026년 4월 24일 오후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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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jpg출판사 제공

결혼한 사실을 잊은 남편, 책의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아내, 매일을 일요일로 착각해 교회로 향하는 남자.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집중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잊느냐’보다, 그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견뎌야 하느냐’에 있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임상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다샤 키퍼가 10여 년 동안 알츠하이머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만나며 기록한 대표적 상담 사례 11편을 엮은 책이다. 과학서이면서도 문학적 울림을 지니고 있고, 뇌과학적 통찰을 제공하면서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잇는 작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 책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는 ‘기억의 미로를 헤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몇 분 전의 일을 잊고,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의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상태를 단순한 공백이나 결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억이 무너져도 뇌는 멈추지 않으며, 감정과 기질, 오랜 습관은 여전히 작동한다.

문제는 이 미로를 함께 걷는 보호자들의 세계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보호자가 겪는 혼란·분노·죄책감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정상적인 뇌’의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강조한다. 건강한 뇌는 타인에게 의사와 도덕성이 있다고 직관적으로 믿기 때문에, 환자가 기억을 잊을 때 이를 ‘배신’처럼 느끼는 쪽은 보호자다.

1장 「브롱크스의 보르헤스」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끝없는 말다툼을 벌인다. 아들은 위험하다며 전선을 만지지 말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언제 만졌느냐”고 부정한다. 보호자는 이 실랑이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한다. 키퍼는 이 장면에서 보호자의 좌절이 성격 문제나 인내심 부족이 아니라, 뇌의 작동 방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짚는다.

이 책의 각 장은 질문 하나로 시작한다. “왜 우리는 환자가 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릴까?” “왜 우리는 환자의 말과 행동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까?” “왜 옳은 선택이 옳지 않게 느껴질까?” 이 질문들은 모두 보호자의 내면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윤리적·정서적 딜레마다.

특히 핵심적인 통찰은 ‘공동 조절 불가능성’에 있다. 암 같은 질병은 환자와 보호자가 어느 정도 동일한 현실을 공유하며 고통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치매는 그 공동 지점을 파괴한다. 보호자는 환자의 스트레스와 공포를 감지하지만, 환자는 보호자가 겪는 감정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이 비대칭은 보호자를 극심한 고립으로 몰아넣는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보호자가 환자를 ‘아직 정상인 사람’과 ‘이미 환자인 사람’으로 번갈아 인식하는 이중성을 지적한다. 이 이중성은 보호자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환자의 인간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모순을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이 모순 속에서 보호자가 스스로를 탓하지 않도록 돕는다.

이 책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보호자도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를 용서하라는 조언은 흔하지만, 보호자가 자신을 용서하라는 말은 드물다. 키퍼는 돌봄을 고역으로 만드는 원인이 보호자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건강한 뇌가 병든 뇌를 상대하기에 구조적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자율성과 안전’ 사이의 충돌이다. 운전을 금지하고, 위치추적기를 달고, 외부 간병인을 들이는 결정은 언제나 보호자에게 도덕적 위반처럼 느껴진다. 환자의 본질적 자아가 여전히 보이는 한, 선택권을 박탈하는 일은 죄책감을 동반한다. 이 책은 그 선택에 정답이 없음을 인정하며, 보호자가 왜 그렇게 오래 망설일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사례집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에세이다. 체호프, 보르헤스,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문학적 참조를 통해,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인간사 전체로 확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치매에 관한 책이면서도, 인간 관계 일반에 관한 책으로 읽힌다.

세계적인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이 책을 두고 “인격 사이에서 벌어지는 ‘춤’을 포착한 책”이라 평했다. 비비언 고닉은 “풍부한 경험과 지혜가 담긴 보물”이라 말한다. 이찬은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이 남기는 여운은 정보가 아니라 시선의 변화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5500만 명 이상, 한국에서도 2026년 기준 약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숫자 뒤에는 항상 보호자가 있다.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데려온다. 환자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미로를 걷는 이들 역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위로를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이해를 제안한다. 왜 우리는 화를 내는지, 왜 우리는 자책하는지, 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놓지 못하는지. 그 물음에 답하며, 돌봄을 ‘옳게’ 해내지 못한 수많은 보호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었을 뿐이라고.”

『기억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기억이 무너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인간성, 그리고 그 곁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내려 애쓰는 사람들의 책이다. 알츠하이머를 이해하려는 이에게도, 누군가를 오래 사랑해본 사람에게도 오래 남을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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