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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는 왜 ‘유대-기독교 문명’이라는 족보를 발명했는가 『만들어진 뿌리』 신간 (소피 베시 지음, 주명철 옮김 | 여문책)

‘유대-기독교 문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서구 정체성 정치의 도구로 만들어졌는지를 해부한 역사 비평서

장세환2026년 4월 24일 오후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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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뿌리.jpg출판사 제공

‘유대-기독교 문명’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당연해졌을까. 서구가 스스로를 정의할 때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이 용어는 정말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문명의 뿌리일까. 『만들어진 뿌리』는 이 질문을 정면에서 제기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서구 정체성 담론의 바탕을 차갑게 해체한다.

이 책의 저자 소피 베시는 튀니지 카르타고 출신의 역사학자로, ‘지중해의 양심’이라 불리는 비판적 지식인이다. 그는 『만들어진 뿌리』에서 ‘유대-기독교’라는 개념이 오래된 전통이나 자연스러운 문명 서사가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정치적 가공물임을 역사적으로 입증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용어가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시기는 1980년대 전후로, 서구가 과거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죄책감을 관리하고 이슬람을 배제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적 언어였다.

『만들어진 뿌리』의 핵심 분석 틀은 ‘은폐·전유·배제’라는 세 가지 구조다. 서구는 자신들이 저질러온 수세기에 걸친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은폐했고, 유대교가 지닌 일신교적 보편성과 도덕적 권위를 전유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슬람을 문명의 외부로 밀어냈다는 것이다. 베시는 이 과정을 통해 ‘유대-기독교 문명’이라는 개념이 서구 중심적 우월성을 재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해 왔다고 분석한다.

특히 이 책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서구 지성사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나치의 제노사이드는 반유대주의의 극단적 결과였지만, 그 이전까지 축적된 반유대적 전통과의 단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서구는 이 비극을 계기로 과거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친유대주의’라는 또 다른 예외주의로 뒤집었고, 이스라엘을 서구 문명의 도덕적 면죄부처럼 다루게 되었다.

베시는 한나 아렌트와 같은 서구 지성의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된 한계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서구 중심적 사고에 대해서는 충분히 문제 삼지 못했다는 점을 짚는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지성 담론 전반이 안고 있는 구조적 맹점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은 중동 문제다. 『만들어진 뿌리』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영원한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서구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하며, 이스라엘 국가와 역사적 유대인 공동체를 분리해서 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베시는 시오니즘과 아랍 민족주의가 모두 ‘순수한 정체성’을 상상하며 내부의 타자성을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서, 서로를 강화하는 보완적 적대자였다고 분석한다.

『만들어진 뿌리』는 서구만을 겨냥한 비판서가 아니다. 저자는 ‘유대-기독교 vs 이슬람’이라는 이분법이 아랍-이슬람 세계에서도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역이용되고 있음을 경고한다. 배타적 정체성 정치가 작동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공존의 기억이 지워지고, 갈등은 고착된다는 것이다.

분량은 100쪽 남짓에 불과하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문명과 정체성의 언어가 어떤 역사적 선택과 폭력 위에 세워졌는지를 묻는다. 서구 문명을 ‘그리스-라틴’에서 ‘유대-기독교’로 재명명하는 과정에서, 동방과의 긴밀한 문화적 교류와 공존의 역사는 어떻게 지워졌는지를 추적한다.

『만들어진 뿌리』는 서구 문명의 기원을 부정하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문명의 뿌리를 단일하고 순수한 계보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베시는 역사적 실체에 기반한 시각을 통해,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가능성을 다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이 책은 중동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이 반복되는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갈등의 언어로 굳어진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해체하지 않는 한, 화해와 공존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현재진행형이다.

『만들어진 뿌리』는 편안한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서구 중심적 서사를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문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배제와 폭력을 직시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짧지만 강력한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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