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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토론은 아니었다, 『고약해 경연학교』 (정성현, 주니어마리)
세종의 경연에서 배우는 듣고 묻는 토론
출판사 제공
말을 잘하는 아이보다, 끝까지 듣는 아이가 드문 교실이다. 질문은 짧아지고, 답은 더 빨라진다. 누가 더 논리적인지 겨루는 방식에 익숙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토론은 점점 ‘이기기 위한 말하기’로 기울어간다. 이런 흐름 속에서, 토론을 다시 ‘함께 생각하는 과정’으로 돌려놓으려는 이야기가 등장했다.
『고약해 경연학교』는 세종 시대 경연을 바탕으로 한 토론 판타지 동화다. 현실의 아이들이 ‘경연학교’에 초대되어 조선 시대로 건너가고, 그곳에서 세종대왕과 신하들의 토론을 직접 경험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간관 고약해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 임금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전하는 존재로, 아이들에게 토론의 태도와 방향을 이끈다.
이 책이 붙잡는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경청, 질문, 논리, 예의, 용기 같은 요소들이 ‘설명’이 아니라 장면 속에서 드러난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소”라며 문제를 던지고, 누구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게 한다. 그 자리에서는 지위보다 생각이 먼저다. 틀린 말보다, 말하지 않는 태도가 더 큰 결핍으로 여겨진다.
아이들의 변화도 이 흐름을 따라간다. 말을 잘하지 못해 주저하던 아이가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들을 처음 만났다”고 털어놓는 장면은, 토론이 단순한 말하기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말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순간, 토론은 경쟁이 아니라 연결로 바뀐다.
세종 시대 경연은 하루에 여러 차례 열릴 만큼 치열한 배움의 자리였다. 하지만 이 책이 끌어오는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분위기다.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간, 틀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 자리, 그리고 끝까지 듣는 사람들이 있는 장면. 토론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지면, 말의 방향도 달라진다.
『고약해 경연학교』는 아이들에게 말을 잘하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말을 어떻게 ‘주고받을 것인가’를 묻는다. 누가 더 잘 말했는지를 따지는 대신, 무엇이 더 나은 길인지 함께 찾는 과정으로서의 토론을 천천히 보여준다.
조용한 교실에서 누군가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는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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