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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이후의 길을 따라 걷다, 『산사, 서른 개의 화두 <저절로>』 (한송주, 전라도닷컴)
전라도 서른 곳 사찰을 순례하며 치유와 연대를 기록한 기행서
출판사 제공
길은 남아 있고, 사람은 그 위를 다시 걷는다. 『산사, 서른 개의 화두 <저절로>』는 전라도의 사찰을 따라 이어진 기록이지만, 그 출발점은 풍경이 아니다.
이 책은 월간 전라도닷컴에 연재된 기행문을 바탕으로, 광주 증심사에서 광양 옥룡사지까지 서른 곳의 사찰을 순례한 과정을 담는다. 그러나 절집을 소개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기행과 결이 다르다. 장소보다 그곳을 통과하는 시간과 사람의 흔적이 먼저 놓인다.
작업의 축에는 두 사람이 있다. 한송주의 글과 이상호의 그림이다. 이상호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겪은 이후, 상처를 향한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왔다. 이 책에 실린 90여 점의 그림 역시 그 연장선에 놓인다. 분노를 겨누던 붓은 점차 방향을 바꾸고, 화면에는 ‘민중의 얼굴을 한 부처’가 등장한다.
글은 사찰을 고요한 공간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절집은 여전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이며, 각자의 사연이 겹쳐지는 자리로 그려진다. 역사적 상처와 일상의 기억, 그리고 불교적 사유가 한 공간 안에서 이어진다. 특정한 교리를 설명하기보다, 머물렀다가 다시 떠나는 과정을 따라간다.
구성은 서른 개의 화두로 나뉜다. 각각의 장면은 하나의 질문처럼 놓이지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처럼, 반복되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시선이 곳곳에 배치된다.
그림은 텍스트를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또 하나의 서술로 작동하며, 장면 사이의 간격을 메운다. 글과 그림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찰은 그대로 있다. 다만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가 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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