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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관계의 얼굴로 스며드는 조종의 심리, 『나르시시스트 죽이기』 (배르벨 바르데츠키, 서교책방)
가스라이팅과 죄책감의 굴레를 끊고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는 심리 전략
출판사 제공
위험한 사람은 늘 거칠고 위압적인 얼굴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다정하고 세심한 말투, 이해하는 척하는 태도, 친밀한 관계의 이름을 앞세워 상대를 조용히 무너뜨리는 경우가 더 많다. 『나르시시스트 죽이기』는 바로 그 익숙한 얼굴 뒤에 숨은 병적인 나르시시즘의 구조를 정면으로 파헤친다. 가족과 연인, 직장 상사처럼 가까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정서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짚으며, 왜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고도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지 설명한다.
저자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35년 넘게 나르시시즘과 자존감의 관계를 연구해 온 심리학자다. 오랜 상담과 연구를 바탕으로, 병적인 나르시시즘이 단순한 자기애나 자만심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무너뜨리는 심리적 지배 방식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자신감 넘치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외부 인정에 대한 과도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를 흔드는 방식이다. 직접적인 폭언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죄책감을 자극하고, 상대의 감정을 과장이나 예민함으로 몰아간다. “다 널 위해서야” 같은 말은 배려처럼 들리지만, 실은 상대의 판단과 감각을 흐리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 쉽다. 반복적으로 이런 관계에 놓이면 사람은 어느새 자기 감정보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살피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쪽으로 밀려난다.
책은 이러한 관계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직장 역시 나르시시즘이 쉽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위계와 평가가 강하게 작동하는 조직에서 독단적인 상사, 성과를 가로채는 동료, 끊임없이 타인을 깎아내리는 리더의 모습은 드물지 않다. 저자는 번아웃과 직장 내 괴롭힘의 배경에도 이런 왜곡된 심리가 얽혀 있음을 짚으며, 조직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실질적인 태도와 거리 두기 전략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나르시시즘을 악인 몇 명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있다. 다만 그것이 타인을 짓밟아야만 유지되는 형태로 굳어질 때 관계는 파괴적으로 변한다. 저자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이해하는 일이 누군가를 손쉽게 낙인찍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조종과 왜곡을 식별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공부라고 말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책의 초점은 상대를 분석하는 데서 자기 경계를 회복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무례를 무례라고 인식하는 일, 상대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일, 기록을 통해 현실 감각을 붙드는 일, 지나친 해명과 자기검열을 멈추는 일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상처를 준 사람을 바꾸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흔들린 자기 존중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 무게를 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관계를 맺는 일은 중요하지만, 아무 관계나 견디는 일이 성숙은 아니다. 친밀함을 핑계로 선을 넘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면 먼저 그 구조를 알아야 한다. 오래 참아온 불편함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에서 단호한 언어와 현실적인 대응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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